효자라고 하면 우리는 채옹과 같은 이미지의 효자를 생각하게 된다.
후한서의 채옹의에 의하면 채읍은 천성이 인자하여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일찌기 그의 어머니가 3년동안 병을 앓고 있을 적에 그는 더울 때나
추울때나 옷을 벗은 적이 전혀 없었고 또 잠도 거의 자지 않았다 한다.
어머니가 사망하자 그는 무덤 앞에 막을 얽고서 거기서 침식을 하였다.
때로는 토끼가 곁에 와서 두려운 생각없이 뛰어 다녔고 또 연지의 나무가
생겨 사람들이 신기하게 여겨서 찾아 왔었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유교도덕을 기초로 한 우리전래의 효자상이 아닐까 싶다.
한말인 고종32년에 정부가 단발령을 내리자 대신 이도재는 반대상소를
올리고 사직하였고 유생들은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켰었던 일이 있다.

단발령에 이처럼 반대한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었지만 근본적으로는 효자상
에 어긋난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이라고 할수있다. 공자는 효경에서 "신체
발부는 부모에게 받은 것이므로 이를 훼손하지 않는것이 효의 시작"이라고
말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효란 우리민족에게 있어서 지상의 명제였다고
할수 있다.

그런데 5월8일의 어버이날을 앞두고 지방자치단체나 민간사회단체에서
우리사회에 귀감이될 효자 효부를 찾지 못하여 애를 태우고 있다는 소식
이다. 한마디로 우리사회에 효자 효부가 기근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이에 대해 경북대 김태영교수는 "핵가족화, 도시화, 산업화에 떠밀려
전통적인 가부장제도가 무너지는데서 오는 어쩔수없는 현상"이라고 진단
하고 전통가치관의 재조명작업등을 제시하였다고 한다. "어쩔수없는 사회
현상"을 "전통가치관의 재조명"등으로 극복할수 있을까.

원래 부자자효라고 하였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면 자녀는 효행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 부모와 자녀간의 사랑이란 인륜이므로 산업사회가
되었다고 해서 없어질수는 없는 일이다. 다만 우리가 생각하는 채읍과
같은 효행은 기대하기가 힘들게 되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현대사회에
있어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란 어떤 것이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우리
모두가 깊이 생각해야 할때가 오지 않았나 생각된다.

한영은 "자식이 효도하고자 하나 어버이는 기다리지 않는다"고 한시외전
에서 한탄하였다. 잘못하면 현대인은 "나는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하였다"는
회한과 자책을 안고서 살아가게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