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 105인이 선정한 역사적 선택…'108가지 결정'

좋은 의미에서건 나쁜 의미에서건 어느 나라나 민족의 역사에는 큰 전환점이 되는 결정이 있게 마련이다.

대학교수와 중고교 교사, 민관 연구소 연구원 등 역사 연구자 105명이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운명을 바꾼 역사적 선택 108가지를 추려 책으로 펴냈다.

이에 따르면 우리 역사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선택을 가장 많이 한 사람은 세종대왕과 박정희 전 대통령이다.

세종은 한글 창제, 대마도 정벌, 4군 6진 개척, 선진적 금속활자 갑인자 주조, '시집살이'의 기원이 된 숙신옹주 친영, 세율 인하와 정액 세제를 핵심으로 하는 공법 개혁(및 후퇴) 등 6개의 결정을 내렸다.

박 전 대통령이 주체가 된 중요 결정은 5·16, 경부고속도로 착공, 베트남 파병, 한일회담, 한글 전용, 10월 유신 등으로 세종대왕과 같은 6건이다.

대표 저자인 함규진 서울교대 교수는 이를 두고 "우리 역사가 전근대는 세종, 근대는 박정희에 의해 대표될 수 있다는 점을 시사한다"면서 "오늘날 우리는 이 두 사람이 남긴 유산에 가장 영향을 받고 있지 않을까"라고 썼다.

우리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두 사람은?
공동 3위는 조선 태종과 선조, 그리고 이승만 전 대통령으로 각각 4개의 역사적 결정을 내렸고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3개의 결정을 내려 5위를 차지했다.

이밖에 2가지 이상 역사적 결정을 내린 인물로는 고려 태조 왕건, 고려 광종, 고려 고종, 조선 광해군, 정조, 흥선대원군, 김일성 전 북한 국가주석, 김영삼 전 대통령, 김대중 전 대통령 등이 있다.

사실상의 실권자였던 흥선대원군을 포함하면 복수의 중대 결정을 내린 인물 모두가 왕이나 대통령 등 최고통치권자였음을 알 수 있다.

책에 등장하는 이들은 왕이나 대통령이 아니더라도 고구려의 남건, 백제의 신검, 고려의 묘청과 같은 반란 주도자, 삼국 통일과 조선 개국의 주역 김유신, 정도전, 조선 개혁파 사림의 시조 조광조, 임진왜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이순신과 같이 큰 틀에서 지배계층에 속하는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권력과 무관한 사람도 없지는 않다.

노비 신분으로 독도를 지키려 한 안용복, 대동여지도를 제작한 김정호, 한국 천주교회를 창설한 이승훈 같은 이들이다.

동학농민운동이나 광주민주화운동과 같이 특정한 개인보다는 '민중'이 주체가 된 사건도 포함됐다.

우리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두 사람은?
구체적인 사건별로 보면 가장 중요한 선택 1위는 한글 창제였고 위화도 회군, 나당동맹, 5·16, 동학농민운동, 과거제 도입, 한국전쟁, 평양천도, 박정희 암살, '동의보감' 편찬 등이 10위 안에 들었다.

외국 또는 외세에 의한 결정도 적지 않다.

시대순으로 가장 앞자리에 위치한 위만의 쿠데타부터 그렇게 볼 여지가 있다.

다만 사마천의 '사기'에 위만이 중국 연나라 사람이라고 적시돼 있지만, 그가 한민족의 일원이었다는 주장도 있으며 당시 시대 상황을 고려할 때 민족의 구분을 따지는 것이 의미가 있는지도 의문이라고 저자는 지적한다.

명성황후 시해, 구한말 일본인 재정고문 메가타 다네히로에 의한 화폐 정리 사업, 2차 대전 종전 후 연합국의 한반도 분할 점령, 유엔의 한국전 개입 결정, 맥아더 해임, 북한 핵 위기가 불거진 1994년 카터의 방북 등은 외세 또는 외국인에 의해 내려진 결정이다.

우리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두 사람은?
주로 정치적 사건이나 전쟁, 국가 정책 등이 다뤄지는 가운데 기업의 결정으로는 유일하게 1982년 '이병철의 반도체 생산 결정'이 등장한다.

저자는 "한 기업의 사업 결정이 한국사에서 그렇게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결정인가"라고 자문하고는 "후후발 산업국, 후진국이었던 한국이 세계에서 어깨를 겨루는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는 데 삼성의 반도체는 그만큼 중대한 기여를 했다"고 자답한다.

자동차, 조선 등 중공업 분야에서 새로운 시도를 한 정주영 현대 회장의 결정 또한 이 못지않게 의미 있는 결정이었다는 지적도 있지만, 저자는 "그것은 현대의 본래 색깔에 따른 것이기도 했고 정부의 방침에 따른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21세기 산업구도에서 반도체가 갖는 비중을 생각할 때 70을 넘긴 나이로 익숙하지 않은 분야에 전력투구하기로 했던 이병철의 결정을 더 중요시해도 되리라 본다"고 밝혔다.

우리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두 사람은?
당초 101명의 역사 연구자들이 참여한 '한국사를 바꾼 결정들' 기획은 102개의 결정을 선정해 지난 2003년 월간지 별책 부록에 게재하는 것으로 마무리됐다.

그러다 최근 추가로 참여한 연구자 4명의 의견을 취합하고 그간의 시대 흐름을 반영해 분석 대상 결정을 108개로 늘렸으며 이를 책으로 펴내게 됐다.

2000년대 이뤄진 결정은 남북정상회담을 제외하면 대통령 탄핵, 수도 이전 무산, 부계성 강제조항 폐지 등 모두 헌법재판소가 연관된 점이 눈길을 끈다.

21세기 들어 헌법적 해석이 역사의 흐름을 뒤바꿀 만큼 중요성을 지니게 됐음을 의미한다.

책에 담긴 108건은 하나하나가 '만일 그때 다른 결정이 내려졌더라면 우리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라는 의문을 갖게 하는 사건들이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는 말을 쉽게 하지만 저자는 이렇게 반박한다.

"역사 해석은 끊임없는 '만약'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하는 분야이기도 하다.

과거에 대한 끝없는 질문이 없었다면 그 대답을 반영한 역사라는 학문조차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의 만약은 그 반대인 진실을 이해하는 유력한 조력자이며 때로 질문에 대답하는 과정에서 그 만약이 새로운 진실의 자격을 획득하기도 한다.

"
페이퍼로드. 536쪽. 1만8천원.
우리 역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두 사람은?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