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빛났지만 단선적 전개 그쳐
명배우가 정극(正劇)을 만나 뿜어내는 에너지는 대단했다. 10년 만에 연극 무대로 돌아온 배우 황정민은 남다른 각오로 연기 역량을 쏟아부었다.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에서 공연 중인 연극 ‘리차드3세’(사진)에서 주인공 리차드3세 역을 맡은 그는 ‘연극은 배우의 예술’임을 온몸으로 증명했다.

‘리차드3세’는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쓴 사극이다. 영국 장미전쟁 시대 말기를 배경으로 훗날 리차드3세가 되는 리차드 글로스터가 왕위를 향해 질주하는 과정을 그린다. 리차드는 등과 손이 굽었고 다리를 전다. 맏형 에드워드4세를 왕위에 앉히기까지 궂은일을 서슴지 않았지만 영예를 얻기는커녕 기피와 무시를 당한다. 그는 차라리 악인이 되기로 한다. 뛰어난 권모술수를 발휘해 형 둘과 어린 조카들, 경쟁 구도의 가신들을 모두 숙청하고 권력의 중심에 선다. 그 이야기를 한아름 작가가 각색하고 서재형이 연출해 무대에 올렸다.

황정민의 리차드 연기는 ‘빙의’에 가까웠다. 극 내내 등을 구부리고 왼쪽 손목은 비튼 채로 다리를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연기를 하면서도 어색함이 없었다. 달콤한 회유와 협박을 동시에 하는 리차드의 언변은 황정민의 안정감 있는 발성과 명징한 발음이 있어 빛을 발했다. 에드워드4세를 맡은 배우 정웅인, 그의 부인 엘리자베스를 연기한 김여진의 호연도 극에 힘을 더했다.

연극은 무엇이 리차드를 뒤틀리게 했는지 보여준다. “세상은 약하고 가난한 자에게 원하는 것을 제때 준 적이 없다”는 그의 말에는 상처받은 이의 서러움이 묻어난다. 숱한 살육 끝에 왕좌에 올랐지만 양심에 가책을 느끼며 괴로워하는 그는 인간적이다. 하지만 그에게 오랫동안 쌓인 분노와 서러움은 “내게 죄를 묻는 당신들의 죄를 묻고자 하오”라는 절규에 가까운 말로 터져나온다. 그가 ‘희대의 악인’인지 ‘비운의 희생양’인지를 고민하게 한다.

아쉬움은 있다. 인간 군상의 여러 측면을 거울 비추듯 보여주면서 인간의 본질을 엿보게 해주는 게 셰익스피어 작품의 묘미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리차드 외의 다른 인물은 그다지 입체적으로 그려지지 않았다. 리차드와 권력 다툼을 하는 엘리자베스와 그 친족들의 야욕, 리차드에게 복종하는 듯하지만 제각기 꿍꿍이가 있는 기사들의 캐릭터 등이 충분히 묘사되지 않고 단순화된 감이 있다. 여러 인물의 욕망이 저마다 꿈틀대며 생동해야 할 작품이 다소 단선적으로 흐른다는 느낌을 준다. 공연은 내달 4일까지.

마지혜 기자 loo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