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밀려오는 사물인터넷(IoT)은 인류 최대의 패러다임 시프트를 가져올 겁니다. 이 새로운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여러분의 힘이 필요합니다.”

2016년 7월, 영국 런던에 있는 ARM 본사를 방문한 손정의 소프트뱅크그룹 회장은 ‘새로운 주인’을 보러 몰려든 직원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일본 소프트뱅크가 반도체회로설계업체인 ARM을 240억파운드, 당시 환율 기준으로 약 35조4000억원이란 거액을 주고 인수한다는 발표가 나온 직후였다. 손 회장은 말을 이어갔다. “여러분이 지금까지 구축해온 비즈니스 모델을 바꿀 생각은 없습니다. 회사 경영체제도 그대로 둘 것입니다. 소프트뱅크는 여러분을 뒤에서 밀어주기 위해 왔습니다. 함께 손잡고 패러다임 시프트의 속도를 올려보지 않겠습니까?”

[책마을] 손정의 '300년 대계'… 기업 아닌 미래를 인수하다
소프트뱅크의 ARM 인수는 2016년 세계 인수합병(M&A)시장의 가장 큰 뉴스였다. 인수 조건이 파격적이었다. 상장사인 ARM의 주식을 시장평가액보다 43% 높은 가격에 전량(100%) 사들이는 결정이었다. 240억파운드(약 3조3000만엔)은 일본 M&A 역사상 가장 큰 인수 금액이었다. ARM은 그해 9월 상장폐지됐다. 시장이나 투자자들의 눈치를 볼 필요 없이 과감한 선행 투자를 통해 회사를 질적으로 성장시키겠다는 손 회장의 의지가 반영됐다.

스키모토 다카시 니혼게이자이신문 기자는 《손정의 300년 왕국의 야망》에서 소프트뱅크가 ARM을 인수한 전말과 내막, 그 속에 담긴 손 회장의 야망과 비전을 상세하게 소개한다. 저자는 손 회장을 비롯한 소프트뱅크의 전·현직 간부를 수차례 인터뷰하고 주요 사건들을 심층 취재한 내용을 바탕으로 ‘손정의 일대기’를 거대한 기업 드라마처럼 흥미진진하게 재구성해 들려준다. 이를 통해 무일푼에서 시작해 당대에 10조엔에 가까운 일본 최대의 부를 일궈낸 그가 어떤 가치관과 판단 기준을 갖고 행동하는지, 어떤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는지 보여준다.

손 회장이 ARM 인수를 처음 검토한 때는 2006년. 당시 M&A팀을 이끌던 니키 가쓰마사에게 ARM을 조사하라고 지시했다. 니키의 결론은 ‘이 회사, 완전히 회장님이 좋아할 만해’였다. 니키에 따르면 손 회장이 구상하는 비즈니스 모델에는 항상 독점체제를 만드는 발상이 들어 있다. 손 회장이 자주 사용하는 단어 중 하나는 ‘플랫폼’이다. 어떤 회사가 플랫폼 역할을 한다는 것은 ‘게임의 룰을 지배하고 있다’ ‘어떤 시점과 시장점유율을 기점으로 산출량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수확체증형 성장 모델을 따른다’는 의미다. 관건은 어떤 시점이 되기 전에 플랫폼을 손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ARM은 당시 회로 설계라는 형태로 반도체산업을 뒤에서 좌지우지하는 플랫폼이 될 가능성이 충분했다.

손 회장의 행동 패턴은 언제나 하나의 사업에 성공하면 또 다른 사업거리를 찾아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이다. 소프트뱅크는 1981년 소프트웨어 유통업으로 출발해 출판, 전시회, 인터넷, 광대역 인프라, 휴대폰으로 차례차례 본업을 바꿔갔다. 그럴 때마다 손 회장이 습관적으로 하는 말이 ‘패러다임 시프트’였다.

소프트뱅크가 2006년 보다폰 일본법인을 인수해 이동통신사업에 뛰어들었을 때 ‘이미 한발 늦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손 회장은 그때도 ‘패러다임 시프트’를 언급했다. 그는 “이제부터 모바일 인터넷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렇다면 다가올 시대의 플랫폼이 될 모바일 인터넷 단말기의 두뇌는 무엇일까. 손 회장이 찾아낸 답이 바로 ARM이었다. ARM이 가진 최대 강점인 저소비 전력을 구현하는 반도체칩 설계 기술이 모바일인터넷 시대의 플랫폼을 장악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하지만 당시 보다폰 일본법인 재건에 매달리느라 기회를 놓쳤다. 그 사이 손 회장의 예상은 적중했다. 세계 스마트폰의 90% 이상이 ARM이 설계한 회로를 채택했다.

손 회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꿈꾸는 ‘300년 지속하는 기업’의 핵심에 ARM이 있었다. 모든 사물이 인터넷을 통해 연결되는 IoT 세계에서는 늘 전원이 연결될 필요가 없는 초저소비 전력 반도체칩을 대량으로 사용하게 될 것이다. 그런 칩 생산에 가장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기업이 바로 스마트폰 시대를 정복한 ARM이었다. 그는 ‘짝사랑’ 10년 만에 과감한 베팅으로 ARM을 품에 넣었다. 손 회장은 단언한다. “앞으로 20년 안에 ARM이 설계한 반도체가 1조 개 이상 지구상에 뿌려질 것이다.”

저자는 ARM 인수 건을 중심으로 손 회장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입체적으로, 세밀하게 펼쳐낸다. 현미경식 밀착 취재와 정교한 스토리텔링이 돋보이는 책이다. 저자가 ‘세계 어디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독특한 경영자’로 평가하는 손 회장이 과연 어떤 사람인지, 지금 무엇을 향해 달리고 있는지, 미래를 어떻게 그리고 있는지 궁금하다면 읽어볼 만하다.

송태형 기자 toughl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