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향기] 실크로드, 역사와 사막의 파노라마
실크로드 여행의 시발점인 중국 산시성(陝西省)의 성도 시안(西安)은 3000년 역사의 고도(古都)다. 지금의 베이징(北京)이 외딴 교역소에 불과했을 무렵 시안은 중세 왕국의 도읍지였다. 세계에서 가장 크고 번성한 도시 중 하나였다. 시안을 찾는다는 것은 곧 ‘역사와의 만남’이다. 시내는 물론 근교의 도처에 우리를 놀라게 하고도 남을 만한 역사의 산물들이 지난날을 그리워하는 듯 말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기 때문이다.

명나라 때 쌓은 성벽이 시내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온전하게 남아 있다는 사실은 이곳이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고도임을 말해준다. 지난날 그 험난한 실크로드를 따라 세계의 중심이던 이곳 시안으로 몰려든 대상들의 열기는 찾을 길 없으나, 그들이 남기고 간 숨결과 역사의 수레바퀴는 오늘도 멈추지 않고 있다.

고승 현장의 흔적이 남아 있는 다츠언쓰

시안의 수많은 사적은 주로 교외에 있지만 시내권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몇 군데 있다. 그중 하나가 성곽 밖 남쪽에 있는 다츠언쓰(大慈恩寺)다.

이곳은 《서유기》의 삼장법사로 유명한 당나라 고승 현장의 체취가 물씬 풍기는 장소로, 현장의 인도 여행과 관련한 유물이 도처에 전시돼 있다. 7층 높이로 우뚝 솟아 있는 대안탑(大雁塔)이 가장 관심을 끈다.

이 탑은 천축국을 두루 여행하고 16년 만에 돌아온 현장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그가 가져온 경전의 번역 작업이 이곳에서 이뤄졌다. 서역 기행기로서 당시 중앙아시아, 파키스탄, 인도 등지의 민족, 지리, 역사뿐만 아니라 중국과 인도 불교의 교류 등을 축소해 기록한 그 유명한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도 이때 쓰여졌다.

시안의 상징적인 존재로 여겨지는 이 탑은 몇 차례의 전란을 겪으면서 다소 파손되기도 하고 여기저기 이끼가 자라는 등 고색이 창연하다. 하지만 내부의 나선형 계단을 통해 꼭대기까지 올라 갈 수 있을 만큼 여전히 견고하다.

다츠언쓰에서 그리 멀지 않는 곳에 또 하나의 우뚝 솟은 탑이 있다. 현장만큼 유명하지는 않지만 당나라의 고승 의정(義淨)을 위해 세운 소안탑(小雁塔)이다. 의정 역시 뱃길로 천축을 여행했으며, 그 기간이 무려 20년이나 걸렸다고 한다. 귀국할 때 그는 400여부의 경전을 가져와 이곳에서 번역했고 《대당서역구법고승전(大唐西域求法高僧傳)》이라는 명저를 남겼다. 소안탑은 서기 707년에 지어진 벽돌탑으로, 원래는 15층이었으나 지진으로 상부 두 층이 무너져 현재는 13층이다.

양귀비와 현종의 비극적 사랑

시안에서 또 하나 빼놓지 않고 들러야 할 곳이 바로 산시성박물관과 비림(碑林)이다. 수많은 소장품 모두 볼 가치가 충분하지만 그중에서도 비림(碑林)은 이름 그대로 비석들이 숲을 이루고 있는 듯한 곳으로, 한(漢)에서 수·당·송나라에 이르는 역대의 명필을 새긴 1095기의 석비가 서 있다. 이 석비들은 공문서 보존의 목적으로 각지에 흩어져 있던 것을 수집한 것이다. 시안 시내 동쪽에는 선사시대의 주거 흔적을 비롯해 화청지, 진시황릉, 병마용갱 등이, 서쪽에는 건릉, 양귀비 묘, 영태공주의 묘 등이 대자연 속에 묻혀 있다. 어느 것 하나 그냥 지나치기가 아쉬운 곳이다.

시안 시내에서 빼놓을 수 없는 유적지가 화청지다. 이곳은 커다란 연못이 있는 온천지인데, 당나라 말엽 그 유명한 천하절색(天下絶色) 양귀비와 현종 황제가 사랑을 나누면서 역사의 비극이 일어났던 곳이다. 양귀비는 본디 현종의 친아들인 수(壽)왕의 부인이었으나 현종의 눈에 들어 그의 총애를 받게 됐다고 한다. 이곳 화청지에 ‘연화탕’과 ‘해당탕’이라는 전용 욕실을 만들고 현종은 매년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양귀비와 함께 환락의 나날을 보냈다. 그것은 결국 당나라의 몰락을 가져왔고 양귀비는 성난 군중에 의해 38세의 젊은 나이로 그 영화를 마쳤다.

진시황 전설 깃든 거대한 무덤, 병마용
진시황의 병마용갱 ♣♣Getty Images Bank
진시황의 병마용갱 ♣♣Getty Images Bank
화청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거대한 산이 보였다. 진시황의 무덤이란다. 경사면을 따라 과수(果樹)들이 꽉 들어 차 있고, 꼭대기까지 나 있는 계단으로 오를 수 있는 이 거대한 것이 무덤이라고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안내자의 말에 의하면, 이곳이 진시황의 무덤이라고 밝혀진 지는 오래됐지만, 기술상의 여러 문제로 아직껏 무덤 내부의 발굴 작업이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한다.

진시황에 대한 것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무덤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서양촌’이라는 곳에서 진시황의 엄청난 절대 권력의 실체를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 ‘병마용갱(兵馬俑坑)’이라 불리는 것으로, 진시황의 근위군단 모습을 한 수천의 토용과 토우들이 땅밑에서 금방이라도 출동할 자세로 서 있다.

1974년 한 농부가 옥수수 밭에서 우물을 파다가 우연하게 발견한 이 병마용들은 실제 사람의 크기로 빚어 구운 것들인데, 죽어서 지하에 있는 진시황을 호위하고 있다. 진시황은 죽어서도 그 권세를 누려왔다. 이 엄청난 발견은 세계인을 놀라게 했으며, 중국에서 가장 귀중한 고고학적 유물로 일컬어지고 있다. 2000년 동안 흙 속에 묻혀 있다가 다시 살아난 이 인마(人馬)의 무리는 진시황의 장대한 스케일을 느끼게 하고도 남는다.

중국에서 네 번째로 큰 불교석굴
중국에서 네 번째로 큰 불교석굴인 마이지산 석굴
중국에서 네 번째로 큰 불교석굴인 마이지산 석굴
고도 시안을 떠나 서쪽으로 이동하면서 실크로드의 여정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그 첫 번째가 간쑤성 톈수이(天水)의 남동쪽 45㎞ 지점에 있는 숭산준령(崇山峻嶺)의 마이지산(麥積山)이다. 이 마이지산 봉우리에 중국에서 네 번째로 큰 불교석굴인 마이지산 석굴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당나라 때 세계의 중심이라 일컬었던 ‘장안’을 떠나 서역으로 들어가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마치 보릿다발을 쌓아놓은 것 같은 모양을 하고 우뚝 솟아 있는 이 작은 산에, 그것도 직각의 절벽에 벌집처럼 수많은 구멍이 뚫려 있는 것이 아주 특이해 보인다. 이 석굴은 4세기에 조성되기 시작해 북위, 서위, 북주, 수, 당, 오대, 송, 원, 명, 청대 등 수많은 왕조를 거치면서 중수(重修)를 거듭해 오늘날과 같은 석굴군이 만들어졌다. 남북조 시대에는 한때 300여명의 스님이 기거한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지금은 너무 많이 훼손돼 텅 빈 굴들이 많아 찾는 이들을 아쉽게 한다.

150m 높이 원형의 붉은 절벽에는 194개의 굴실(窟室)과 감실(龕室)이 남아 있다. 이 굴감들에는 여러 불상과 소상, 벽화의 흔적들이 있는데, 절벽에 설치된 난간을 따라 오르내리다 보니 아슬아슬한 게 짜릿한 느낌을 준다.

높이 27m의 거대한 미륵불상…빙링쓰 석굴

빙링쓰 석굴 선착장에 하선하는 관광객들
빙링쓰 석굴 선착장에 하선하는 관광객들
흔히 중국의 3대 불교 석굴을 말할 때 베이징에서 가까운 다퉁(大同)에 있는 윈강(雲崗)석굴, 뤄양(洛陽)의 룽먼(龍門)석굴, 둔황(敦煌)의 무가오굴(莫高窟)을 꼽는다. 그 규모와 화려함을 기준으로 삼은 것으로 생각된다. 5대 석굴을 말한다면 여기에 앞서 언급한 톈수이(天水)의 마이지산 석굴과 황허 유역의 빙링쓰(炳靈寺) 석굴을 더할 수 있다.

실크로드의 관문 격인 란저우(蘭州)를 떠나 황허 상류에 배를 띄워 그 유명한 빙링쓰를 찾아간다. 강을 따라 3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니 산세가 바뀌어 기암절벽들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중국 무협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장엄하고 제법 으스스하기까지 한 풍광이다. 순간 그 경이로운 풍광이 분위기를 압도하더니 틈새로 뭔가를 보여준다. 암벽에 새겨진 거대한 불상이다. 거기에 빙링쓰 석굴이 보석처럼 박혀 있다.

먼 옛날을 꿈꾸는 듯한 분위기에 휩싸여 석굴 앞에 서니 중앙 벽면에 새겨진 27m 높이의 거대한 미륵불상이 보는 이를 압도한다. 이곳에는 183개의 석굴이 있는데, 그 안에 크고 작은 불상이 776기나 봉안돼 있다고 한다. 서진(西秦, 385~431년)에서 청대(淸代)에 이르는 1500여년의 장구한 세월 동안 조성된 것들이지만 대부분 당대에 만들어졌다. 이 중 제169굴에 들어 있는 ‘빙링쓰 불입상’은 그 곁에 건홍(建弘) 5년(424년)의 햇수가 담긴 먹글씨 기록이 남아 있어 서진의 문소왕(文昭王) 말년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재까지 알려진 중국 석굴 불상 조각으로는 가장 오래되고 연대가 확실한 자료라고 한다.

그 옛날 서역의 험로를 오가던 고승들에게 오아시스 역할을 하면서 번성한 빙링쓰 석굴. 깎아지른 절벽에 벌집처럼 조성된 석굴들마다 남아 있는 벽화의 흔적과 부조들이 세월의 무상함을 말해준다. 이제 댐 건설로 인해 옛길은 사라지고 물에 갇혀 외로운 처지가 되고 말았지만 그 옛날의 분위기를 느껴보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서역으로 통하는 하서회랑을 지나 둔황으로

간쑤성 서부, 치롄산맥 북쪽 기슭에 동서로 이어진 길이 1000㎞의 오아시스 지대인 하서회랑(河西回廊)은 서역으로 통하는 긴 통로다. 이 회랑을 지나 거친 모래와 자갈이 딱딱한 토양에 뒤덮인 불모의 땅인 거비탄을 달리다 보면 보이는 것은 온통 불 같은 태양 아래 가시풀과 자갈이 뒤섞인 황량한 사막뿐이다. 쾌속으로 달리는 열차를 타고도 멀고도 먼 길이다. 하지만 낙타 등만을 의지한 채 길 없는 길을 가야만 했던 대상(隊商)이나 고승들의 고통은 여기에 비할 바가 아니었을 것이다.

거비탄의 남쪽에 있는 둔황은 기원전 100년께 한 무제가 흉노족의 유목지였던 하서지방을 세력권에 넣으면서 황허의 서쪽에 무위(武威), 장액(張掖), 주천(酒泉)과 함께 두었던 이른바 하서사군(河西四郡)의 맨 서쪽에 있는 곳이다.

당시의 흔적을 미미하나마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지금의 시내에서 서쪽으로 대략 70㎞쯤 떨어진 양관(陽關)에 남아 있는 봉화대의 흔적과 서북쪽으로 더 멀리 떨어져 있는 옥문관(玉門關)의 성채 일부가 고작이다. 모두가 황량한 사막에서 긴 세월 외롭게 남아 지난날을 짐작케 하고 있을 뿐이다. 당시 옥문관을 나서면 서역북로를 향해 나아가고, 양관은 타클라마칸 사막 남쪽을 돌아가는 서역남로로 가기 위해 반드시 지나야만 했던 길목이다. 두 곳 모두 한나라 당시의 중국 밖으로 향하는 길목인 셈이다. 누가 말했던가. 한 잔 술에 동서남북 만리가 보이는 곳이라고. 열풍 속에 천군만마(千軍萬馬)의 함성이 들리는 듯해 취하고 또 취하고 싶은 곳이다.

모래의 울음소리가 들린다는 밍사산

절벽에 지은 둔황의 무가오굴
절벽에 지은 둔황의 무가오굴
둔황에는 이름도 고운 밍사산(鳴沙山)이 있다. 말 그대로 모래의 울음소리가 난다는 모래산이다. 거대한 사구들이 그리는 선들과 그 사이에 형성돼 있는 월아천(月牙泉)의 신비함은 오늘날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들이고 있다. 하지만 진정 의미가 있는 곳은 이 밍사산의 동쪽 끝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거대한 불교미술의 보고인 무가오굴이다.


무가오굴 내부의 부조상
무가오굴 내부의 부조상
‘천불동(千佛洞)’이라고도 불리는 무가오굴이 언제 열렸는지 정확하게 밝혀진 것은 없지만, 전진(前秦)의 건원 2년(366년) 승려 낙준이 첫 굴을 열었다는 설이 굳어지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1600년 전에 수업의 장소를 구하러 이 지역을 두루 돌아다니던 낙준 스님이 밍사산이 금빛으로 빛나는 모양을 보고 천불이 나란히 서 있는 장대한 형상을 마음에 아로새겨 평생 수업을 위해 굴 하나를 여기에 열었다는 것이다. 둔황문물연구소에 따르면 현재 볼 수 있는 굴은 492개, 벽화의 총 면적은 4만5000㎡로, 폭 1m로 나열하면 45㎞에 달한다. 실로 사막 가운데 있는 거대한 화랑이자 미술관이라고도 할 수 있다.

무가오굴의 이름이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20세기 초, 17굴인 ‘장경동’에서 많은 양의 고문서가 발견되면서다. 이때 우리의 고승 혜초가 쓴 《왕오천축국전》도 프랑스의 동양학자 페리오가 몰래 빼내간 문서들 중에서 발견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태양빛에 빛나는 무가오굴 주변 풍경은 황량하기만 하다. 어느 시대, 누구의 것인지 알 길 없는 몇 개의 부도탑이 무가오굴 앞 광야에서 오늘날까지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박하선 여행작가

여행메모

옛 모습이 남아 있는 시안의 전통거리
옛 모습이 남아 있는 시안의 전통거리
인천~시안은 약 3시간10분 걸린다.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항공, 또는 중국항공의 직항편이 시안을 오간다. 시안역에 대기하고 있는 1일 시티투어버스를 타면 시안의 주요 관광지인 병마용, 진시황릉 등을 한 번에 둘러볼 수 있다. 700위안(12만3235원). 자유롭고 여유롭게 관광지를 보고 싶다면 택시를 전세 내는 것이 가장 좋다.

시안은 국제적 관광지이기 때문에 고급 호텔이 많다. 하지만 경제적인 여행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해 배낭족이 많이 몰리는 호텔을 추천한다면 역전에 있는 ‘해방반점’을 중심으로 여러 저렴한 호텔을 꼽을 수 있다. 지방 도시에서도 마찬가지다.

시안 회족거리(후이민제)의 회교도 여성들
시안 회족거리(후이민제)의 회교도 여성들
시안 시내의 명물인 ‘후이민제(回民街·회족거리)’에 가면 먹거리가 넘쳐난다. 여러 종류의 만두 요리가 일품이다.

서쪽 지방도시에 가도 야시장이 있기 마련이어서 양고기를 비롯해 각종 음식을 맛보면서 시간을 즐길 수 있다. 쇼핑할 때는 특정한 곳을 빼고는 바가지 요금이 많으니 조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