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위를 걷는 게 기적인가,땅 위를 걷는 게 기적인가. 죽을 날이 아득한 사람들에게는 전자가 기적이겠지만,죽을 날이 지척인 사람에게는 후자가 기적.그러나 기적은 쉽게 일어나지 않는 법.죽음을 피해가는 기적이 허락되지 않는 한,인간의 삶은 사라져가는 것들이 있는 애잔한 풍경첩일 수밖에 없다.

소설가 구효서씨(52 · 사진)는 소설집 《저녁이 아름다운 집》(랜덤하우스)의 표제작 <저녁이 아름다운 집>에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인생의 저녁을 살아가는 남자를 이야기한다. 남자는 자식도 없이 혼자 남을 아내를 위해 집 지을 땅을 산다. 그런데 자신이 살 수 없는 집에 남자가 붙인 이름이 의미심장하다. 우리말로 풀면 '저녁이 아름다운 집'이 되는 '석가헌'.

구씨는 '석가헌'을 통해 죽음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나는 당신만 있으면 돼요"라고 말하는 아내에게 누님과 가까이 사는 게 편할 거라고 설득하고,"언제까지 내가 모는 차를 탈 거야? 그리고 보일러 수압 맞추는 것도 당신이 해"라고 잔소리를 늘어놓는 남자의 속내에는 애정과 배려가 있다. 이런 속사정도 모르고 아내는 집터 한쪽의 이름모를 산소를 이장하는 대신 그냥 놔두기로 결정한 다음,"죽음이야 늘 도처에 있는 건데 마당 곁에 좀 있은들 어때요?"라고 말해버린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아내의 철학적 깨달음은 남편이 사망했을 때에는 현실적 절망으로 바뀔 것이다. 작가는 한 작중 인물의 입을 빌려,죽은 자의 살뜰한 마음이 산 자 곁에 남을 때 죽음도 아름다울 수 있다고 말한다. "나무든 뭐든 모습이란 늘 드러냈다간 감추고 감추었다간 다시 드러내는 것이니까요. 상관없어요. 저녁노을빛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는 나무를 상상할 수만 있으면 됩니다. "

표제작이 죽을 자에 초점을 맞췄다면 <명두>는 숱한 죽음을 지켜본 남은 자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오랫동안 마을을 굽어본 굴참나무를 화자로 내세운 <명두>에서 주인공 격인 명두집은 살아남기 위해 아이 셋을 죽여 나무 밑에 파묻는다. 그런데 아이들을 가슴에 한 번 묻고 땅에 두 번 묻은 명두집에게 갑자기 영험한 힘이 생긴다. 근엄한 낯빛으로 사람에게 붙은 귀신을 쫓아내어 병을 다스리는 능력을 부여받은 명두집은 그를 찾아온 병자들에게 딱 한마디 한다. "잊은 게 있지?" 명두집의 말은 사람들에게 죽거나 죽인 아이,죽거나 죽인 부모를 떠올리게 한다. 명두집은 "죽지 않으려면 죽는 걸 겁내선 안돼.피하지 말고 사귀어야 돼.삼켜서 몸 안에 고이고이,길이길이 간직해.불망(不忘)!"이라고 냅다 소리지른다. 죽음을 기억해 힘을 얻게 된 명두집의 사연을 통해 구씨는 죽음의 역설을 이야기한다. 삶을 위해 죽음이 필요한 거라고,죽음을 기억하면 가슴 속에 제가끔 삶의 길을 품게 된다고.

<조율-피아노 월인천강지곡>에서는 연인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아 산사에 은신하던 남자가 죽은 연인을 만나고 받아들이는 모습을 신비스럽게 보여준다. '어느새 바깥의 것들이 텅 빈 그의 몸 안으로 들어와 있었으니까. 그것들에 감싸여 있던 남자는 가없이,가없이 커져 그것들을 감싸고 있었다. 더 이상 넘지 못할 벽 같은 건 없었다. '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