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형편없는 기억력 탓에 중간중간 여러 개의 톱니바퀴가 빠진 것처럼 보이긴 하겠지만,어쨌든 인생은 서로 물고 물리는 톱니바퀴 장치.'

소설가 김연수씨(39)는 네 번째 소설집 《세계의 끝 여자친구》에서 우리의 삶을 이렇게 표현한다. 소설 9편 속의 인물들은 사랑이든,상실이든,죄의식이든 영원히 잊지 못할 '치명적인' 톱니바퀴가 하나씩 있었던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삶은 단 한 번만 이뤄질 뿐이며 지나간 순간은 두 번 다시 되풀이되지 않는' 법이다. 그렇다면 지금도 가슴을 저미는 그 한순간은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표제작 <세계의 끝 여자친구>는 여자친구를 데리고 세계의 끝까지 가고 싶었지만,여자친구가 다른 남자의 아내인지라 함께 갈 수 있었던 가장 먼 곳이 고작 호수 건너편 메타세쿼이아 나무에 불과했던 시인의 이야기다. 시인은 젊은 나이에 암으로 죽었고 그의 애달픈 사랑도 결말을 내지 못했다.

하지만 김씨는 아름다웠던 한순간이 다 지나갔다고 해서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고,그 순간을 되돌릴 수는 없어도 그 덕에 삶은 의미를 얻는다고 말한다. '우리가 사랑했던 나날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이해되기만을 기다리며 어리석은 우리들을 견디고 오랜 세월을 버티기 때문'이다.

연하의 한국인 유학생 '케이케이'를 열정적으로 사랑했던 과거를 가슴 속에 묻고 사는 외국인 여성 작가의 이야기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도 마찬가지다. 연인이 죽은 뒤에도 꾸역꾸역 살아남아 50대 후반에 접어든 작가는 '케이케이를 사랑하던 세포들은 이제 내 몸 안에 없다'는 생각만으로도 눈물이 흘러내릴 것 같은 상태다.

케이케이의 흔적을 찾아 한국을 찾아왔지만 작가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대신 '우리 안에서,내부에서,그 깊은 곳에서,어쩌면 우리가 늙어서 죽을 때까지도,불은 우리의 예상보다 좀 더 오랫동안 타오를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소설 속 인물들은 좋았던 과거를 되살리거나 나빴던 과거를 고쳐쓸 수 없다는 점을 증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과거를 기억하면서 살아간다면 그때의 이야기 못지않은 새로운 이야기가 있는 삶이 펼쳐진다고 말한다. <웃는 듯,우는 듯,알렉스,알렉스>의 마지막 문장은 이를 탁월하게 보여준다.

'그로부터 인생은,쉬지 않고 바뀌게 된다. 우리가 완벽한 어둠 속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이야기는 계속 고쳐질 것이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이제 그가 어디로 가느냐에 따라서 첫 문장은 달라질 것이다. 그는 어둠 속 첫 문장들 속으로 걸어갔다. '

이고운 기자 cc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