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에 틀어박혀 사는 한 여자(정려원)가 우연히 한강 밤섬에 있는 김씨(정재영)를 망원경으로 관찰하다가 망설임 끝에 편지를 쓰기로 결심한다. 컴퓨터로 출력한 글자는 'HELLO'.그 다음 서신은 'THANK YOU','HOW ARE YOU?' 등으로 이어진다.

초간단 영어 회화를 쓰는 작업은 간단하다. 그러나 글쓰기까지 과정과 쓴 편지를 한강 다리 아래로 던져 전달하기까지 절차는 길고도 복잡하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는 관객들의 가슴은 훈훈한 온기로 데워지고 입가에는 미소가 떠오른다. 지독한 외로움으로 소통하고 싶었던 경험을 떠올리면서.

14일 개봉되는 '김씨 표류기'(감독 이해준)는 로빈슨 크르소에 유머를 입힌 '한국판 로빈슨 크루소'다. 11년 전 톰 행크스의 '캐스트어웨이'로 바다에서의 표류기는 이미 종식됐다고 선언한 제작진이 도심 속 무인도 불시착기를 그린 것 자체가 코미디다. 기발한 상황 설정과 재치있는 대사도 신선한 웃음을 던져준다.

도입부는 어둡다. 회사의 구조조정과 대출 빚에 시달리다 한강에 투신한 김씨는 곡절 끝에 밤섬으로 들어가게 된다. 무인도에서 생존 투쟁을 벌이던 그는 어느날 익명의 쪽지를 담은 와인병을 발견하고 희망으로 설레기 시작한다. 인터넷에 의지한 채 '왕따'로 사는 한 여자로부터 '삶의 호출'을 받은 것이다.

김씨의 고군분투기는 재미있다. 단백질을 섭취하고 싶어 강에서 물고기를 잡으려 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덫을 설치해 잡으려던 새들도 속아주지 않는다. 그러다 새알을 훔쳐먹는 순간은 얼마나 짜릿한가. 난파한 오리배를 수선해 '내집 마련'의 꿈을 이루고,인스턴트 자장면 스프를 발견한 후 자장면을 팽개쳤던 오만방자했던 옛 일이 새삼 가슴을 저리게 한다. 마침내 자장면을 직접 만들기까지 과정은 웃음을 줄뿐 아니라 삶의 치열함도 가르쳐준다.

'밤섬을 무대로 벌어지는 두 남녀의 이야기'라는 한정된 공간과 인물을 재치넘치는 에피소드들로 풍성하게 채워넣었다. 에피소드들은 우리가 평소 무심코 지나치는 사소한 일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일깨워준다.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