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가 자신의 음악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만든 바이로이트 음악축제는 1876년 7월에 처음 열렸다. 바그너 음악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니체는 이 축제에 참석하기 위해 갔다가 바그너의 음악과 바이로이트의 분위기에 크게 실망한 나머지 8월 6일 클링스브룬으로 '도망치듯' 떠나온다. 축제 주간 동안 육체적, 정신적으로 아주 쇠약한 상태였던 니체는 게르스도르프와 로데, 파울 레 등 친구들 곁에서 잠시 정신적 안정을 되찾게 되지만 여전히 구토를 일으킬 정도로 심한 두통을 호소하는 등 절대 안정이 필요했다. 며칠 후, 다시 바젤로 돌아온 니체는 그 사이에 특별한 목적 없이 써 두었던 단편적인 글들을 그의 제자이자 조수로 항상 곁에 있던 하인리히 쾨젤리츠에게 다시 베껴써서 정리하도록 지시했다. 1876년 9월 본격적으로 착수해 나중에 니체가 한 번 더 수정한 이 글들에는 원래 '쟁기날'이란 제목이 붙어 있었다. 1876년 10월 니체는 다시 파울 레와 함께 벡스, 제노바를 거쳐 이탈리아 남부휴양도시인 소렌토로 여행을 떠난다. 여기서 그는 자신은 물론 바그너와도 좋은 친분을 맺고 있던 마이젠북이 초대한 자리에서 이미 그 곳에 와 머물고 있던 바그너를 만나게 되는데, 이것이 그들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그리고 니체는 그 곳에 체류하면서 그간 틈틈이 써놓았던 단편적인 글들을 본격적으로 손질하기 시작, 마침내 1878년 5월 30일 한 권의 완성된 책을 세상에 내놓는다. 이 책이 바로 니체 스스로 '위기의 기념비'라 칭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다. 이번에 책세상에서 니체 전집 제7권으로 나온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Ⅰ」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전반부에 해당하는 것으로, '자유정신'이라는니체의 핵심 사상이 담겨 있는 저서이다. 자연과학에 근거한 과학적, 학문적 사유의 도입이라는 새 국면으로 전환되는 니체 철학의 정수가 담긴 중요한 철학서인 이 책은 프랑스 사상가 볼테르의 서거 100주년을 기념해 그에게 바쳐졌다. 이는 니체가 볼테르를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 나타난 핵심 사상인 '자유정신'의 표상으로 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니체는 더 이상 과거 자신이 열광했던 쇼펜하우어나 바그너가 아닌 볼테르에게서 자유롭고 해방된 정신을 소유한 위대한 사상가의 상징을 발견했으며 이는 곧 종교 및 예술적 정신에 대한 결별과 함께 과학적 사유에의 경도를 의미하기도 했다. 니체가 말하는 '자유정신'이란 그 어떤 체계와 규율에도 얽매이지 않는 지극히 자유롭고 가볍게 방랑하는 정신, 관습적인 것에서 해방된 정신이다. 또 '수없이 많은 대립적인 사유방식에 이르는 길을 허용하는 성숙한 정신'으로 학문과 과학의 우월함을 보여 준다. 이 저작은 과거 그가 경도됐던 전통 형이상학과 쇼펜하우어 철학의 부정, 바그너 및 바그너 음악과의 결별, 자유정신이라는 세 가지 입장을 통해 니체 사상의 전체적인 흐름에서 독특한 위상을 차지한다. 또 여기에 실린 글들은 삶의 문제를 예리한 사상가의 눈으로, 그러나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에서 간결하고 명쾌하게 그려내고 있다. "신념은 거짓말보다 더 위험한 진리의 적이다" "직업은 삶의 척추이다" "대화의 소재가 없어서 당혹스러울 때, 친구의 비밀스러운 사항을 누설하지 않는 사람들은 거의 없을 것이다" "만약 부부가 함께 살지 않는다면 성공적인 결혼이 훨씬 많은 것이다" 등 냉철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무자비할 정도로 적나라한 문장에서 인간과 인간의 삶을 꿰뚫어보는 니체의 통찰력이 배어 나온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Ⅰ」은 1878년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879년 「여러 가지 의견과 잠언」, 1880년 「방랑자와 그 그림자」로 각각 따로 출간돼 나중에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Ⅰ,Ⅱ」로 묶은 것의 전반부다. 짧게는 한 줄에서 길게는 서너 쪽에 이르는 독립적인 단편 630여개로 구성돼 있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Ⅰ」은 형이상학, 도덕, 종교에 대한 비판적인 철학적 논의에 이어 후반부에서는 친구의 문제, 남성과 여성, 가족의 문제, 그리고 국가의 문제를 경쾌하고 간결한 문장 속에서 언급한다. 이러한 단편적이고 잠언적인 표현양식이야말로 이전의 저작과 가장 뚜렷하게 구분되는 특징이다. 짤막한 단편의 형식은 천재적 사유, 자유로운 정신을 집약적으로 드러내는 데 적합한 것이었다. 이 천재적 사유의 핵심은 지금까지 믿어 왔던 가치와 진리를 해체하는 것이며 특히 바그너적인 이상주의를 향해 비판의 화살을 날리고 있다. "그대들이 이상적인 것을 보는 곳에서 나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것을 본다" 그리고 이같은 사상은 그의 다음 저작인 「즐거운 학문」과 「차라투스트라는이렇게 말했다」로 계승, 발전된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출간을 계기로 니체는 그 때까지 그의 주위를 떠나지 않고 있던 동료와 친구, 정신적 지주를 모두 잃는다. 그리고는 깊은 겨울과도 같은 고독 속에서 혼자만의 독자적인 길을 가게 된다. 484쪽. 2만원. (서울=연합뉴스) 정 열 기자 passion@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