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진소설가 세 사람이 오랜만에 장편과 산문집을 각각 펴내 관심을
모으고 있다.

홍성원씨와 최일남씨가 장편 "그러나" (전2권 문학과지성사 간)와
"시작은 아름답다" (해냄 간)를, 한승원씨가 산문집 "키작은 인간의
마을에서" (고려원 간)를 내놓은 것.

세 사람 모두 지난 역사의 생채기와 오늘의 현실을 낮지만 진지한
목소리로 다뤄 중진의 무게를 느끼게 하고 있다.

홍성원씨의 "그러나"는 독립지사였다가 말년에 친일파로 변신한
인물의 비극적 생애를 담고 있다.

변절한 독립운동가의 고뇌를 통해 뼈아픈 한국근대사의 이면을 비춘다.

소설은 주인공 김형진이 독립운동가 현산 한동진의 일대기를 쓰기
위해 그의 삶을 추적하면서 전개된다.

애국지사이자 선각자로 존경받던 현산은 생애 후반에 접어들어
어두운 족적을 남긴다.

일제를 찬양한 일기가 발견되고 관동군첩보원이었던 일본여인과
동거해 낳은 딸 에다가 나타난다.

작가는 이를 추적하면서 한일간의 뿌리깊은 반목과 역사의 소용돌이에
희생된 한 인간의 내면을 찬찬히 그려보인다.

형진과 에다의 사랑은 양국간의 화해를 상징하는 것으로 읽힌다.

최일남씨의 "시작은 아름답다"는 유신시대의 독재권력과 나약한
지식인의 초상을 그린 작품.얘기는 5.16이 일어난지 2년뒤 한 신문사
편집국의 마감시간 묘사에서 시작해 유신직후 자유언론실천선언을
결의하는 기자들의 모임으로 마무리된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험한 세상"에 대응하는 지식인의 삶을 다양한
프리즘으로 보여준다.

4.19세대의 이름으로 유신지지 성명을 내는 정치인과 군사정부의
간택으로 청와대에 들어간 언론인, 책을 던지고 유정회 국회의원으로
변신한 교수등 갖가지 군상이 등장한다.

한편에는 산림을 개간하고 민주화에 대한 장기계획을 세우며 때를
기다리다 동네청년들에게 불온사상을 주입시켰다는 혐의로 잡혀가고
교수서명을 주도하다 발각돼 감옥살이하는 이들의 고통이 얼룩져
있다.

한승원씨의 "키작은 인간의 마을에서"는 작가가 체험한 "잊을수 없는
일들"과 평범한 이웃들의 세상사는 모습을 담고 있다.

가족에 얽힌 추억과 창작생활 휴면기에 바닷가에서 쓴 삶의 기록들이
잔잔한 감동을 준다.

아들에게 팥죽 한그릇을 먹이기 위해 한겨울에 멀건 싱건지국만
들이켰던 어머니와 끊임없이 베풀기만 하는 아내의 모습등은 읽는사람의
가슴을 아리게 한다.

어릴때 "영거리 (총기)가 없다고 맨날 지청구를 받던" 그가 "잘 타면
박수 한무더기요, 잘못 타면 목이 부러지는 외줄타기같은" 소설에
매달리게 된 동기도 들어있다.

그는 또 불교설화와 민간설화를 통해 "도마위에서 칼을 기다리는
물고기를 놓아주듯 욕심의 울타리속에 갇혀있는 네 스스로를 놓아주어라"는
교훈을 일깨운다.

< 고두현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6년 5월 27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