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크 & 사이언스

카이랄 물질, 광학활성 뛰어나
3차원 영화에 입체감 더해

KAIST 연구진, 나노물질 개발
바이오 센서·반도체 등에 활용
아미노산과 황화구리를 결합해 스스로 만들어지는 ‘나노 꽃’ 전자현미경 사진.  /KAIST 제공

아미노산과 황화구리를 결합해 스스로 만들어지는 ‘나노 꽃’ 전자현미경 사진. /KAIST 제공

물체를 거울에 비추면 좌우가 바뀌는 것을 제외하고 그대로 보이는 게 정상이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실제와 다르다면 어떨까. 이런 비대칭성을 과학에서는 ‘카이랄(chiral)’ 성질이 있다고 한다. 수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에선 모두 카이랄 성질을 갖는 존재가 있다. 나노미터(㎚·1㎚=10억분의 1m) 이하 미시 세계로 들어가면 카이랄 성질이 예사롭게 나타난다. 단백질의 주요 성분인 아미노산도 카이랄 성질을 갖고 있다.

카이랄 물질은 ‘광학 활성’이 뛰어나다. 오른쪽 또는 왼쪽 등 들어오는 빛의 방향에 따라 흡수율이나 발광률이 달라지면 광학 활성이 높다고 지칭한다. 빛을 받아들일 때 정해진 방향으로 반사하는 일반 물질과 차이점이다.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대표적 카이랄 물질이 3차원(3D) 안경이다. 영화 아바타 등 3D 영화 상영관에선 프로젝터에서 오른쪽·왼쪽 편광을 동시에 쏜다. 3D 안경이 이 빛을 차단 또는 투과시키면서 거리감을 부여하기 때문에 입체감을 느낀다.

염지현 KAIST 신소재공학과 교수 연구팀은 넓은 범위에서 광학 활성이 좋은 카이랄 나노 물질을 최초로 개발했다고 1일 밝혔다.

기존에 보고된 카이랄 물질은 자외선과 가시광선 영역에서만 활성을 갖고 있어 응용에 한계가 있었다. 연구팀은 바이오기술(BT)과 나노기술(NT)을 융합해 적외선 영역까지 광범위한 광학 활성을 갖는 카이랄 소재를 처음 선보였다. 아미노산과 황화구리 나노입자를 접목하는 ‘기발한’ 방법을 썼다.

아미노산은 복잡한 3D 구조로 꼬여 있는데, 왼쪽으로 꼬이게 하는 아미노산 내 카이랄 성분을 L-시스테인이라고 한다. 오른쪽으로 꼬이게 하는 성분은 D-시스테인이다. 이들 시스테인은 카이랄 성능을 부여하는 화학 소재로 시중에서 판매되고 있다. 연구팀은 L, D-시스테인을 황화구리 나노입자에 발라 오른쪽 또는 왼쪽으로 휘는 카이랄 성질을 부여했다. 그리고 이 입자 사이의 인력(끌어당기는 힘)과 척력(밀어내는 힘)을 조절해 1~2마이크로미터(㎛·1㎛=100만분의 1m) 길이의 ‘카이랄 나노입자 꽃’이 만들어지도록 유도했다. 이른바 ‘자가조립’이다.

이렇게 디자인된 나노 꽃은 자외선부터 가시광선, 적외선에 걸쳐 편광에 따라 특이하게 반응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존에 알려진 카이랄 물질들이 적외선 영역에 쓸모가 없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가시광선과 다르게 적외선은 피부 등 신체 조직을 잘 투과할 수 있고, 공기 중에서 에너지 손실이 적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리모컨을 눌러도 TV가 반응하는 것은 리모컨 빔이 투과성이 좋은 적외선이기 때문이다.

연구팀은 이번에 개발한 카이랄 나노입자 꽃을 칩 형태로 만들어 바이오 센서, 적외선 신경 치료기 등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나아가 뉴로모픽 칩(뇌의 뉴런-시냅스 구조 모사 반도체)에도 카이랄 성능을 부여하는 연구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오른쪽 편광, 왼쪽 편광, 직진 세 가지 신호에 반응하는 반도체 설계가 가능하다는 설명이다. 이렇게 되면 두 가지 신호(0 또는 1)로 구동되는 현재 반도체보다 저장 용량이 훨씬 커질 수 있다. 연구를 주도한 염 교수는 “카이랄 물질을 활용하면 이론적으로 초저전력 고속 컴퓨터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마찬가지 원리로 검은색, 흰색뿐인 QR코드를 대체하는 차세대 인식 기술을 설계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번 연구 결과는 미국화학회가 발행하는 국제학술지 ‘ACS 나노’에 실렸다.

이해성 기자 ih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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