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유행은 세계 백신 개발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있다. 각국이 백신 개발에 사활을 걸면서 다양한 방식의 백신이 한꺼번에 쏟아지고 있다.

미국 모더나와 화이자, 독일의 바이오엔테크가 처음으로 메신저 리보핵산(mRNA) 백신 상용화 시대를 열었다. 영국과 러시아도 바이러스벡터 백신 개발에 성공했다. 중국도 바이러스벡터 백신과 단백질재조합 백신을 개발했다. 하지만 한국산 코로나19 백신은 1년 뒤에나 나올 전망이다. ‘백신 패권국’들과의 격차가 최소 2년 넘게 벌어졌다는 평가가 나온다.

77개국에서 코로나 백신 접종

연구인력 태부족, 정부는 저가입찰…백신자급률 일본 100% vs 한국 50%
블룸버그에 따르면 지난 14일 기준 코로나19 백신 접종을 시작한 나라는 77개국에 이른다. 미국 중국 영국 등은 물론 아프리카의 이집트 기니 모리셔스 등도 접종을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영국에서 화이자 백신을 처음 접종한 지 두 달 만에 세계에서 1억7200만 도스의 코로나19 백신이 접종됐다.

하지만 주한미군 관계자를 제외하면 국내에서 코로나19 백신을 맞은 사람은 없다. 모더나, 화이자, 아스트라제네카 등 제약사와 정부가 7900만 명분의 백신 구매계약을 맺었지만 1차 물량이 국내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산 백신 개발 속도도 더디다. 백신 개발 마지막 단계인 사람 대상의 임상 3상 시험에 들어간 국산 제품은 아직 없다.

반면 임상 3상을 마치거나 3상 단계에서 국가별 사용 승인을 받은 제품은 세계적으로 10개에 이른다. 미국 영국은 물론 러시아 중국 인도가 각각 자국에서 개발된 백신을 사용 승인했다. 윤영호 서울대 의대 교수는 “코로나19 바이러스의 변이가 생기는 데다 새로운 감염병이 언제든 유행할 수 있기 때문에 감염병을 극복할 수 있는 백신 플랫폼을 구축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다.

백신 주권 상실의 고통

국산 백신의 중요성은 2009년 신종플루 사태를 통해 알 수 있다. 당시에도 신종플루가 세계적으로 유행할 우려가 있는 상황이었지만 영국과 독일 등이 조기에 충분한 백신을 확보하며 사태가 수습됐다. 한국도 초기에는 국민의 2.7%가 맞을 수 있는 130만 명분의 백신만 확보했으나 그해 7월 GC녹십자가 전남 화순공장에서 백신을 생산하면서 문제가 해결됐다. 10월 국산 백신 접종이 시작됐고 치료제인 타미플루가 보급되면서 두려움은 점차 사라졌다.

하지만 2015년 39명의 사망자를 낸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유행 때는 달랐다. 진원생명과학, SK케미칼, 녹십자 등이 앞다퉈 메르스 백신 개발에 뛰어들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정부 지원이 없었던 데다 유행이 일찍 끝나면서 임상을 위한 환자를 찾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메르스는 코로나19와 마찬가지로 코로나바이러스에 속하는 만큼 당시 한국이 백신 개발에 성공했다면 이번에 글로벌 백신 개발 경쟁을 주도할 수도 있었다.

기술도, 인재도 부족

코로나19 유행 상황이 국내 백신산업 현주소를 보여줬다는 평가다. 미국 영국 일본 등의 백신 자급률이 100%에 이르는 데 비해 국내 자급률은 50%에 그친다. 생명공학 기술 역사가 깊은 서구 국가와 비교하면 한국은 아직 걸음마 단계이기 때문이다.

기업의 연구개발을 지원하기보다 저렴한 백신 확보만 선호하는 정부 정책은 이 같은 상황을 악화시켰다. 시장 기능보다 공공의 역할만 강조하며 초저가 입찰 시장만 팽창해 백신의 질과 관리 환경은 악화됐다. 지난해 11월 유통 과정에서 다량의 독감 백신이 상온에 노출돼 폐기된 것이 단적인 예다. 미국은 1993년 공공백신 사업 확대로 백신 회사가 17곳에서 5곳으로 급격히 줄자 시장 기능 회복으로 정책을 바꿨다. 좋은 백신에 비싼 값을 줄 수 있도록 입찰 시스템을 바꾸고 백신 개발회사의 세금까지 감면해주고 있다.

백신 개발 등에 힘써야 할 인력 자원도 태부족이다. 매년 국내 최고 인재가 의대 등으로 몰리지만 연구 인력난은 계속되고 있다. 임상 환경을 잘 아는 의사는 진료에만 매진하고 양질의 생명공학 인력은 해외로 떠나면서다. 건강보험이 의료 서비스 공급을 독점해 가격을 통제하는 시스템도 인력 쏠림을 부추긴다. 의료의 질보다 양으로 수익을 내는 구조가 되면서 진료량을 늘려야 수익이 나는 의료기관에서 백신 개발 등에 몰두하는 의사들이 설 자리가 사라졌다.

의사들의 벤처 창업을 육성하는 정책도 절실하다. 김상은 서울대 의대 교수는 “미국은 벤처투자를 통해 의사들의 기술 창업을 돕는다”며 “국내 병원도 기업주도형 벤처캐피털(CVC)이 될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고 했다.

이지현 기자 bluesky@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