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의 최소 단위인 원자 주위 전자는 한 개의 원자에 속박돼 있다는 것이 그동안 물리학계의 정설이었다. 이와 정반대로, 전자 1개가 여러 원자에 걸쳐 존재할 수 있다는 새로운 사실을 국내 연구진이 처음 발견해 국제학술지 '네이처'에 실었다. 도·감청 등이나 해킹이 불가능한 차세대 통신기술 '양자 정보통신'으로 연결될 수 있는 기초연구 성과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박제근 서울대 물리천문학부 교수, 정현식 서강대 물리학과 교수, 김재훈 연세대 물리학과 교수, 손영우 고등과학원 계산과학부 교수(이상 공동 교신저자)가 이같은 논문을 내 네이처에 게재했다고 21일 발표했다. 강순민(서울대), 김강원(서강대), 김종현(연세대), 김범현(고등과학원) 연구원이 공동 1저자로 논문을 작성했다.

연구팀은 자성을 띤 2차원 반데르발스 물질인 '삼황화린니켈'에서 전자 1개가 여러 원자에 나뉘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전자는 위치를 특정할 수 없고 확률적으로만 추정할 수 있는데, 추정 장소를 특정 원자 주위가 아닌 다른 여러 원자로 확장할 수 있다는 얘기다.

반데르발스 물질은 분자간 찰나에 생기는 느슨한 힘으로 층간 결합이 이뤄진 2차원 물질을 말한다. 반데르발스 물질은 어떤 장비로 어떻게 연구하느냐에 따라 다양한 물리적, 양자역학 현상이 나타나 '소재·부품·장비' 경쟁력을 높일 연구 주제로 최근 부각되고 있다. '꿈의 신소재' 그래핀도 반데르발스 물질 가운데 하나다.

엑시톤은 전자와 정공(전자가 차 있지 않은 구멍)이 정전기적 인력으로 결합되는 양자역학 상태의 물질을 말한다. 전자와 정공이 결합하는 순간 광자(빛)가 발생하기 때문에, 엑시톤은 양자 광원(光源)이 필요한 양자정보통신을 구현하는 데 중요한 열쇠로 간주된다.

연구팀은 삼황화린니켈에서 결맞음성이 매우 강한(에너지 분포 신호가 매우 좁은) 엑시톤 신호가 방출하는 현상을 확인했다. 광방출 실험, 광흡수 실험, 공명 비탄성 X선 산란실험 등 세 가지 실험을 교차 진행해 데이터를 확보했다. 이들 데이터를 150만여개 이상의 경우의 수를 다루는 방대한 수학적 방법으로 분석했다.

이런 연구 끝에 해당 엑시톤은 전자 1개가 여러 원자에 나뉘어 존재하는 '양자 다체상태의 엑시톤'이란 점을 발견했다. 양자 다체상태는 1988년 처음 등장했으나 증명되지 않아 사장(死藏)됐던 이론이다. 연구팀의 이번 연구에 따라 양자 다체상태가 이론을 넘어 실존할 수 있다는 점이 입증됐다.

연구팀 관계자는 "이번에 발견한 엑시톤은 자성을 띠는 스핀(전자의 제자리 회전운동) 자유도가 양자역학적으로 얽힌 매우 특이한 형태이자, 근본적으로 새로운 양자상태"라며 "(양자 다체상태의 엑시톤이)양자 정보통신 기술 혁명을 앞당길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또 다른 연구팀 관계자는 "세 실험팀(서울대, 연세대, 서강대)과 한 이론팀(고등과학원)이 새로운 아이디어와 결과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연구를 흥미롭게 진행했다"며 "지난 5년동안 지하철 2호선을 함께 타고 다니면서 수많은 토론을 했기 때문에 이번 연구성과를 '과학의 2호선 오디세이'라고 부르고 싶다"고 말했다.

이번 연구를 주도한 박제근 서울대 교수는 지난 2012년부터 지난달까지 과기정통부 산하 기초과학연구원(IBS) 강상관계물질연구단 부연구단장을 지냈다. 이달 들어 과기정통부 한국연구재단이 지원하는 '2020년 리더연구' 17개 과제 가운데 '2차원 자성체 연구:자성 반데르발스에서 자성 위상까지' 과제 책임자로 선정됐다. 리더연구는 1인당 최장 9년간 총 70억여원(1년 평균 8억)을 지원한다. 과기정통부 기초연구 사업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다.

이해성 기자 ih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