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일 미국 최대 만화 축제인 ‘코믹콘(Comicon)’이 열린 로스앤젤레스(LA) 컨벤션센터. 마블코믹스와 DC코믹스의 인기 캐릭터 복장을 한 관람객들로 인산인해였다. 행사장 한쪽에 ‘웹툰’의 인기 만화작가 레이철 스미스(33)의 사인을 받으려고 수백 명이 줄을 섰다. ‘웹툰’은 네이버의 인터넷 만화 자회사인 네이버웹툰이 북미 지역 독자를 겨냥해 내놓은 만화 서비스 플랫폼이다.

이날 첫 사인을 받은 미키 베스(17)는 하반신 장애인으로 언니 케이트 베스(18)와 함께 4시간 동안 차를 몰아 팬 사인회를 찾았다. 그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웹툰을 보는 사람이 주변에 수두룩하다”며 “인기 웹툰 작가가 되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미국 웹툰 팬들이 지난 12일 로스앤젤레스(LA)에서 열린 미국 최대 만화 축제 ‘코믹콘(Comicon)’에서 네이버 웹툰 작가들의 사인을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네이버웹툰 제공
미국 웹툰 팬들이 지난 12일 로스앤젤레스(LA)에서 열린 미국 최대 만화 축제 ‘코믹콘(Comicon)’에서 네이버 웹툰 작가들의 사인을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네이버웹툰 제공
미국 웹툰 시장 연 71% 성장

한국에서 시작된 인터넷 만화 플랫폼 웹툰이 세계 만화 콘텐츠와 작가들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한국 웹툰의 스토리 전달 기법과 화풍(畵風)을 보고 배운 해외 만화 지망생들이 현지 문화와 감성을 담은 만화를 선보이면서 웹툰을 기반으로 하는 거대한 만화 생태계가 구축되고 있다.

네이버가 세계에서 운영하는 웹툰에 만화를 게재하는 아마추어 창작자는 약 58만 명에 이르며 전업 작가도 1600여 명에 달한다. 북미 시장의 성장세가 특히 가파르다. 2014년 7월 첫 서비스를 시작한 후 2016년 10월 월 방문자 수(MAU)가 150만 명을 돌파했다. 2017년 10월 300만 명, 2018년 10월 550만 명, 2019년 10월 900만 명 등 3년간 연평균 71%씩 늘었다.

김준구 네이버웹툰 대표는 “북미 지역에 매일 올라오는 신작 만화만 1000편이 넘는다”며 “10년 전 폭발적으로 성장한 한국 웹툰 시장을 보는 것 같다”고 말했다.

출발은 순조롭지 않았다. 네이버웹툰 미국 법인의 데이비드 리 콘텐츠부문 대표는 “처음 서비스를 시작할 때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1등 상금 3만달러의 만화 콘테스트를 한다고 광고했더니 ‘사기꾼’이라는 댓글만 잔뜩 달렸다”며 “만화 창작자들의 생태계를 조성하는 게 가장 힘들었다”고 했다.

대형 기획사 중심의 미국 만화 생태계도 웹툰이 자생하기 어려운 걸림돌이었다. 미국은 만화뿐 아니라 애니메이션, 영화 등 콘텐츠 제작 시스템이 철저하게 세분화·분업화돼 있다. 판권과 같은 지식재산권(IP)도 전적으로 제작사가 갖는다. ‘슈퍼맨’ ‘스파이더맨’과 같은 히어로 중심의 만화 시리즈가 주로 번성해온 이유다. 김 대표는 이런 미국 시장에도 웹툰 작가가 되려는 다양한 사람이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아마추어 작가들이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 무대(캔버스)를 마련해주고, 그중 유망한 작가를 선별해 지원합니다. 작가들에게 우호적인 계약 조건을 맺습니다. 작품마다 다르긴 하지만 IP로 번 이익의 70%까지 작가가 가져갈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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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엔 없던 만화가 생태계 조성

이런 작가 양성 시스템은 2000년대 한국 웹툰 시장에 형성된 독특한 생태계다. 사내외에서 소문난 ‘만화 덕후’인 김 대표 는 만화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인력과 자원을 아끼지 않았다. 야후, 다음보다 후발주자였던 네이버웹툰이 국내외 독보적인 1위로 올라선 비결이다.

일단 작가들이 활동할 무대가 만들어지자 다양한 분야의 인재가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날 코믹콘에서 만난 몬지(Mongie·필명)는 정보기술(IT) 개발자로 일하다 웹툰 작가로 전업했다. 그의 인기작인 ‘렛츠 플레이’의 정기 구독자 수는 280만 명에 달한다.

몬지는 “IT 개발자로서 최고위직까지 올랐지만 창의적인 일은 1%도 하지 못해 미련 없이 회사를 그만뒀다”며 “나처럼 생각하는 미국 전역의 만화 작가 지망생들이 웹툰으로 몰려들고 있다”고 말했다.

스미스는 뉴질랜드에서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디자인을 가르치다 전업 작가가 됐다. 최근 들어선 회계사 등 전문직 출신 작가도 나오는 등 웹툰 작가들의 출신과 배경이 점점 다양해지고 있다고 네이버웹툰은 설명했다.

김 대표는 “웹툰은 제작 비용이 낮아 누구나 창작자가 될 수 있고 영화, 애니메이션 등으로 추가 수입을 올리기 쉽다”며 “디즈니처럼 다양한 콘텐츠를 제작하고 거래할 수 있는 플랫폼으로 네이버웹툰을 키우겠다”고 강조했다.

로스앤젤레스=좌동욱 특파원 leftki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