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정세가 평창동계올림픽을 거치며 급속히 대화 국면으로 넘어가는 분위기다. 대화와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려는 북·미 간 기(氣)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사실상 남북이 공동으로 미국에 ‘대화 문턱을 낮추라’고 요구하자 미국은 ‘적절한 조건’을 들어 거부 의사를 분명히 했다. 북한이 비핵화 의지를 어떻게 보여줄지, 한·미 양국은 어떤 카드로 보조를 맞출지 주목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도발-대화-도발이라는 전철을 밟지 않겠다고 밝혀왔다.
대화 손 내민 북한에 '조건' 단 트럼프… "25년간의 실패 반복 않겠다"
◆엇갈리는 ‘북·미대화 조건’ 발언

트럼프 대통령은 26일(현지시간) 북·미 직접대화에 나설 적절한 조건은 언급하지 않았다. 대신 왜 북한이 대화에 나섰는지를 강조했다. 그는 “모든 사람이 (대북 군사옵션에 따른) 엄청난 규모, 아무도 생각조차 해보지 못한 인명 피해 규모에 대해 이야기한다”며 “그래서 그들이 대화를 원하는 것”이라고 했다.

세라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이 정례 브리핑에서 대화 조건과 관련, “앞으로 논의될 어떤 대화든 그들이 한반도 비핵화에 동의하는 문제에 오로지 초점이 맞춰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지만 모호하다. 김영철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의 대화 용의 발언 후 성명을 통해 “대화할 용의가 있다는 메시지가 비핵화로 가는 길을 따르는 첫걸음인지 두고 볼 것”이라고 한 것과 다르지 않다.

전문가들은 이를 두 가지로 해석했다. 워싱턴 외교 소식통은 “미국도 갑자기 찾아온 대화 국면에 대화 조건 등과 관련한 내부 컨센서스를 확실하게 마련하지 못한 것 같다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마이크 펜스 미 부통령은 지난 11일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 참석 후 미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그들이 대화를 원하면 우리도 하겠다”며 조건 없는 대화의 가능성을 언급했다.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도 “공식협상에 앞서 비핵화에 나설 준비가 돼 있는지 파악할 대화가 필요하다”고 탐색대화 정도의 가능성을 언급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의 ‘적절한 조건’ 발언 같은 의견이 더 강해 보인다. 니키 헤일리 유엔 주재 미국대사는 지난달 초 “북한이 핵·미사일 도발을 중단하고 확실한 비핵화 의지를 보여야 대화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비핵화 압박 의지 재차 강조

트럼프 대통령이 모호한 상황을 전략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백악관 사정에 밝은 한 소식통은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이 먼저 가이드라인을 주기보다는 북한이 알아서 가드를 내리고 협상장에 나오길 바라고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군사옵션까지 거론하며 북한을 몰아붙인 최대 압박전략이 성과를 내고 있는 만큼, 북측이 대화 이전에 비핵화를 확실히 약속하는 행동을 보일 수 있도록 압박을 계속한다는 전략이다.

다른 외교 소식통은 “북한이 대화하자고 해서 미국이 바로 호응할 것으로 보지 않는다”며 “북·미 대화를 앞두고 샅바싸움이 이미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한국 정부는 이르면 이번주 중 이도훈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을 미국에 파견해 북·미가 만날 ‘중립지대’를 만드는 노력을 본격화한다는 구상인 것으로 알려졌다. 문재인 대통령도 곧 트럼프 대통령과 통화해 평창동계올림픽 지원에 감사하고 북·미 대화 조건 등에 대해 얘기할 것으로 알려졌다.

◆“한·미동맹 어느 때보다 강해”

샌더스 대변인은 이날 정례 브리핑에서 ‘북한의 한·미 균열 시도가 성공했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우리의 동맹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하다”며 “지난 며칠간에도 훌륭한 협력이 있었다”고 강조했다. 지난 23일 발표된 미국의 대북제재에 대해서도 “전 세계의 기업과 국가들은 트럼프 행정부가 한반도의 영구적 비핵화를 위해 100% 전념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백악관은 또 이날 이방카 트럼프 백악관 보좌관을 단장으로 하는 미국 대표단 일원으로 한국을 방문했던 앨리슨 후커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한반도 보좌관과 북한 외무성 최강일 부국장 간 접촉은 없었다고 밝혔다. 워싱턴포스트는 25일 평창동계올림픽 폐회식 현장에서 두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며 북·미 실무접촉 가능성을 제기했다.

워싱턴=박수진 특파원 ps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