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단편적인 요약 형식으로 밖에 접하지 못했지만 헤겔의 ‘노예의 변증법’은 독특한 매력이 있는 논리게임이다.(책만 덮으면 내용이 기억나지 않는 것도 ‘노예의 변증법’의 또다른 매력이기도 하다.) 특히 이 ‘노예의 변증법’에는 피라미드와 관련된 인상적인 표현이 등장한다.

우선 인간의 본질을 ‘위신을 위한 투쟁(Prestige Kampf)’에 있다고 본 헤겔에 따르면 인간은 대등욕망과 우월욕망으로 불리는 이 투쟁을 위해 말그대로 사력을 다한다고 한다. 즉 이 위신투쟁에는 목숨을 걸고 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조건이라는 것. 만약 죽음이 두렵거나 목숨이 아까워 항복한다면 노예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게 헤겔의 논리다.



즉 바로 이 지점부터 지배와 예속(Herrschaft und Knechtschaft), 주인과 노예가 구분되기 시작한다. 일단 주인과 노예가 구분된 이후에는 주인은 목숨을 구걸한 노예를 가혹하게 다룰 수 밖에 없다. 노예를 다루는 방식은 가혹한 노동을 시키는 것이고 이 가혹한 노동의 대명사는 바로 “피라미드를 지어라!”라는 명령의 형식으로 표현된다. 백년 남짓한 기간 동안 2500만t에 이르는 엄청난 돌을 사람의 힘으로 옮겨 만든 피라미드야말로 노예의 고통을 표현하는 더할 나위없는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철학과 논리의 세계가 아니라 실제 역사속에선 헤겔이 노예에게 가해지는 가혹한 처벌,노동의 상징으로 본 피라미드는 어떤 자유와 권리도 없는 노예가 만든 것이라기 보다는 어느정도 보상을 받은 일종의 ‘임금 노동자’들이 만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해석이라고 한다.

칼 A.비트포겔이 “최소의 아이디어로 최대의 자재를 허비한 전제주의적 기념물”이라고 평한 피라미드를 실제로 마주 대하면 자연스레 아주 정교한 노예소유자들의 국가를 떠올리는 게 인지상정이지만, 이같은 인상은 단순히 하나의 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피라미드 건설과 관련해선 대규모 협동노동과 분업이 이뤄져야만 했고, 수십만의 사람들이 같은 목표를 실현하기 위해 동원돼야 했다. 이 과정에서 ‘채찍’만 가지고 이 대업을 완수하는 것은 불가능 했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피라미드를 만들던 고대 노동자들의 야영지에서 발견된 흔적이나 테베 근방 데이르 엘 메디네에서 발견된 노동자 생활지 유적을 보면 모든 인부들이 적절한(?) 대가를 받았다는 게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한다. 숙련공 뿐 아니라 채석장에서 석재를 단순히 옮겨 공사현장에 쌓아놓는 단순 비숙련 노동자들까지도 빠짐없이 일정수준의 대가를 받았다는 것. 측량가, 제도공, 공학자, 목수, 채석공은 물론 화가와 조각가 등 숙련·비숙련 가릴 것 없이 모두 숙식을 제공받고 노동의 댓가를 지불받았다.

일부에선 구체적인 댓가에 관한 기록도 남아있다. 비록 피라미드가 지어진 시기보다 후대긴 하지만 중왕국 시대 세소스트리스1세 때 스핑크스를 건립할 석재덩어리를 채석하는 원정대에겐 각 직급별로 배분되는 빵과 맥주의 상세한 배분 기록이 남아있다. 인솔자와 장교, 석재 조각공 인솔자, 채석장인, 사냥꾼, 수공업자 및 기타 직군별로 자세히 기록이 남아있는데 인솔자 1명이 빵 200에 맥주 5단위, 석재조각공 인솔자 20인이 각각 빵 30에 맥주 1단위, 채석장인 1인이 빵 15에 맥주 47/60단위 식으로 배급된 것이다. 석재조각공 100인, 채석공 100인, 선원 200인, 새잡이 60인, 제화공 60인, 부역에 징발된 노동자 1만7000명, 술빚는 사람 20명, 곡식 빻는 사람 20명, 정육 관계자 20명, 잡심부름꾼 50인 등 노동자 1만8630명은 각 빵 10에 맥주 1/3단위가 공급됐다.

또 데이르 엘 메디네의 노동자 유적을 살펴보면 동굴작업에 지급될 램프의 수효가 반나절용씩으로 보통 공급됐다는 게 확인된다고 한다. 이를 통해 무덤 건설에 동원된 노동자들은 하루 8시간씩 작업을 하고 정오에는 점심식사를 위해 휴식시간이 끼어 있는 하루 10시간 리듬으로 작업이 이뤄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당시 서기들이 기록한 결석자 명단을 보면 노동자들이 작업에 빠지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는 점도 살펴볼 수 있다.

서기들의 주요 임무는 임금을 지불하는 것으로 곡물분배 형태로 임금이 지급됐다고 한다. 소맥의 일종인 에머밀이나 맥주 원료인 보리 등이 임금의 주류를 이뤘다.예를 들어 십장은 하루 다섯자루반의 에머밀과 보리 두자루를 받고 성문지기는 다섯자루 에머밀과 두자루의 보리를 지급받는 식이었다. 일반 노동자들은 네자루의 에머밀과 한자루 반의 보리를 배급받았다고 하는데 이는 15∼18세기초 유럽의 빵배급에 비해서도 넉넉한 양의 곡물을 확보할 정도로 대우를 잘 받았다고 한다.

이밖에 기름과 야채,과일,생선,연료 따위도 지급됐고 소금 모피 육류도 드물지만 배급목록에 끼었다고 한다. 육류는 여러명의 노동자에게 소 한마리가 배당돼 각자가 소가운대 배당분을 지니는 형식으로 나눠졌다고도 한다.

심지어 고대사회의 파업도 기록이 남아있다. 람세스3세 치세 29년 되던해 무덤 노동자들에게 임금이 제 때 지급되지 못하고 일부 또는 전액이 채불되자 분묘군 노동자들 사이에서 파업이 발생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사람은 끊임없이 돌릴 수 있는 기계가 아니고 채찍만으로는 큰 업적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고대 파라오들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채찍의 유효기간은 매우 단기간이라는 점을 고대의 전제군주들도 경험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무지막지하게 채찍을 휘두르고 자유를 박탈한 강제노동으로 만들었을 것 같은 피라미드도 당연히 있었을 ‘채찍’과 억압외에 충분한 물질적 보상이라는 ‘당근’이 있었기에 만들어질수 있었고 수천년의 세월을 살아남을 수 있었다. 큰 일을 하기위해선 쉴틈을 주지 않고 강행군으로 밀어붙이기만 하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 적절한 보상과 여유를 병행하는 게 올바른 방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에게도 좀더 여유가 주어진다면 더 일을 잘할 거 같은 생각이 든다.


<참고한 책>
헬무트 쉬나이더, 노동의 역사-고대 이집트에서 현대 산업사회까지, 한정숙 옮김, 한길사 1994
모겐 위첼, Builders & Dreamers-경영은 어떻게 현대사회에서 중심이 되었나, 김은령 옮김, 에코리브르 2002
김윤식, 비평가의 사계, 랜덤하우스 2007
Karl A. Wittfogel, Oriental Despotism- A Comparative Study of Total Power, Vintage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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