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러시아가 중앙아시아 최빈국 중 하나인 키르기스스탄의 마나스 미 공군기지를 두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다음 주 의회 승인 절차가 남아있기 하지만 키르기스 정부는 마나스 공군 기지 폐쇄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서방은 이번 키르기스의 미군 기지 폐쇄 결정이 러시아의 부인에도 불구, 러시아 측의 `작품'이라는데 거의 일치된 반응을 보이고 있다.

2001년 9.11테러 이후 당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은 아프가니스탄에서 탈레반 정권을 제거하려는 미국의 군사작전을 지지하며 중앙아 군 기지들을 미군이 사용하는데 묵시적 동의를 표했다.

미국의 반테러 작전에 러시아가 지원의사를 밝힌 것은 앞서 치른 체첸 전쟁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크렘린궁은 미국의 군사작전으로 아프간 상황이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중앙아에 주둔 중인 미군이 여간 탐탁지 않았다.

러시아는 미군이 중앙아 군 기지를 상설화하지 않을까 우려했고 미국 정부는 아프간 작전이 종료되면 장기 주둔은 없을 것이라면서 러시아를 안심시키려 했다.

러시아는 중앙아 미군 병력을 통해 이곳의 막대한 에너지 이권을 차지하려 하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품었다.

이에 러시아는 2003년 마나스에서 30km 떨어진 곳에 칸트 기지를 세웠다.

칸트 기지는 러시아가 소련 해체 후 구소련 국가에 세운 첫 군 기지다.

1년 뒤에는 타지키스탄에 기계화 소총사단과 항공부대를 결합한 군 기지를 추가로 설치했다.

하지만, 키르기스 정부가 생각했던 것보다 미군의 마나스 기지 주둔 기간이 길어졌다.

지난 2006년 12월 발생한 미군 장교의 현지인 총격 살해 사건 이후 반미 감정이 폭발하면서 기지 폐쇄 여론이 급등했지만, 키르기스 내부 사정으로 금세 잠잠해졌다.

그사이 러시아와 미국 양국 관계는 동유럽 미사일방어(MD) 계획, 나토 확장, 그루지야 전쟁 등으로 냉전 이후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으면서 구소련 국가들에 대해 다시 한 번 고개를 돌리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특히 러시아는 구소련국가에 속한 우크라이나와 그루지야가 친서방 쪽으로 자꾸 기울자 동쪽의 다른 구소련 국가들에까지 영향이 미치지 않을까 노심초사해 왔다.

러시아는 서쪽으로부터 느끼는 안보 위협을 사전에 차단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미 국방부 한 관리는 5일 뉴욕타임스에 "러시아가 중앙아 국가들과의 관계를 강화해 미국이나 나토 기지를 그들의 땅에 들여놓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러시아는 마나스 기지에서 미군을 쫓아내야겠다고 결심했고 금융위기에 경제 지원이 절실했던 키르기스 정부로서도 러시아의 경제 지원이 미군 기지 존치보다 훨씬 구미를 당기는 일이었다.

키르기스는 이번에 러시아로부터 20억 달러 규모 차관과 1억8천만 달러 채무 탕감, 1억 5천만 달러 무상 금융지원을 받기로 했다.

미국은 마나스 공군기지 존치에 대해 키르기스와 협의를 계속하고 있다면서 한 가닥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키르기스 의회가 내주 미군기지 폐쇄를 승인하면 미군은 6개월 이내에 기지를 비워줘야 한다.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은 5일 "기지 폐쇄를 검토하는 것은 유감이며 더 논의하기를 원한다."라면서 "그러나 키르기스 정부가 어떤 결정을 내리든 우리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으로 행동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마나스 기지 폐쇄가 확정되면 정권 초기 러시아와 화해를 모색하면서 아프간 작전을 효과적으로 수행하려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안보 전략에 큰 차질이 예상된다.

탈레반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고 파키스탄을 통한 보급로가 끊긴 상황에서 2001년부터 아프간 보급로 역할을 해온 마나스 기지 폐쇄 결정은 오바마 행정부로서는 타격이 아닐 수 없다.

매달 1만 5천여 명의 미군 인원과 500t의 물자가 이 기지를 통해 아프간으로 들어가고 있다.

미군은 이미 아프간 남부에 3만 명을 증강하는 계획을 마무리했고, 오바마 대통령이 수일 내 증파 계획을 공식 승인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은 매년 약 1억 5천만 달러를 키르기스에 기지 사용료와 원조금으로 주었지만, 금융위기로 방심하는 사이 러시아에 마나스 기지를 뺏긴 셈이 됐다.

4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옛소련 7개 국가의 안보 동맹인 집단안보조약기구(CSTO)가 합동 신속 대응군을 창설하기로 했고 그 병력의 일부를 마나스 기지에 배치하는 안이 제안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미국의 아프간 작전에 협조 의사를 피력해 놓고 다른 한쪽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아프간 작전에서 러시아의 역할 확대와 함께 이를 지렛대로 MD 계획,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 등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려는 의도가 다분하다는 것이 서방 관측통들의 분석이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6일 "러시아는 우리 영토를 통한 미군의 아프간 물자 보급을 허용할 것"이라면서 미국에 대한 협조 의사를 재차 밝혔다.

이런 가운데 AP통신 등 외신들은 이날 미국이 우즈벡과 타지크 등 다른 중앙아 국가에 대안 기지를 건설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전했다.

그러나 이들 국가와 협상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한 데다 러시아의 눈치를 보는 중앙아 국가들이 미군 주둔을 쉽사리 허용할 리 만무하다는 지적이다.

미국은 2001년 우즈벡 카시-카나바드에 아프간전 지원을 위한 기지를 건설했지만 우즈벡은 2005년 이 기지를 폐쇄했으며 우즈벡의 인권 현실을 비판하면서 양국은 갈등 관계를 이어왔다.

미군은 최근 우즈벡, 타지크와 아프간 보급로 제공 문제에 합의했다고 주장했다.

미군은 차선책으로 중앙아 국가들 외에도 아랍에미리트(UAE)를 기점으로 하는 새로운 공중수송로도 대안으로 고려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아직 마나스 기지 폐쇄 여부가 확정은 되지 않았지만, 이번 사태로 해빙 조짐을 보이던 미-러 관계는 또다시 경색될 것으로 보인다.

일부에서는 오는 3월 양국 외무장관과 국방장관이 참여하는 `2+2' 회담에서도 이 문제가 거론되면 원래 의제인 핵무기 감축과 MD 협상에 부정적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모스크바연합뉴스) 남현호 특파원 hyunho@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