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의 임기만료를 이틀 앞둔 23일 워싱턴 포스트는 1973년8월 발생한 이른바 `김대중 납치사건'에서 미국이 한 역할을 소상히 밝혔다. 당시 국무부의 한국과장이었던 도널드 L. 레이너드의 아들인 도널드 A. 레이너드는 워싱턴 포스트에 기고한 글에서 "김대중씨가 당시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당시 주한 미대사였던 필립 하비브와 나의 아버지가 상부의 지시를 묻지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하비브 대사는 상부의 지시를 기다릴 시간이 있었지만 외국의 인권문제에개입하기를 꺼리던 워싱턴의 상관들이 김대중씨를 구하는데 필요한 종류의 조치를승인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독자적으로 한국 정부관리들에게 압력을 가했다"고 말했다. 하비브 대사는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으로부터 납치사건의 범인이 한국의중앙정보부(KCIA)라는 말을 듣고 직원들에게 그들이 아는 중요한 직위의 한국사람들에게 모두 접촉할 것을 지시했다. 그는 직원들에게 "만일 (중요한 한국사람이) 사무실에 없으면 집으로 찾아가라. 한밤중이라도 좋다. 한밤중에 찾아가면 그들은 미국이 가볍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대사관의 대니얼 오도노휴 정무참사관은 "대사는 우리에게 말했다. 한국사람들과 그들이 그짓을 했는지 안했는지를 놓고 말싸움을 하지말라고. 단지 그들에게미국은 이 사람이 살아있기를 원한다고 말하라는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하비브 대사 자신은 당시 총리를 만나 만일 김대중씨가 살아서 돌아오지 않으면"당신은 큰 문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레이너드 한국과장은 김대중씨 납치소식이 전해졌을 때 뉴욕에서 유엔의 회의에참석하고 있었다. 그는 회의장을 떠나 자신의 부하인 웨스 크리벨과 하비브 대사에게 전화를 건 뒤 크리벨과 함께 언론에 발표할 성명을 만들었다. 레이너드 과장은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미국이 납치사건에 관해 어떤 말을 하는 지 주의깊게 듣고 만일 어떤 우유부단함이 간파되면 김대중씨를 죽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1960년 주한 미대사관 정무참사관으로 4.19 혁명에 대한 미 대사관의 지지를 이끌기도 했던 레이너드 과장은 크리벨과 함께 작성한 성명에서 "미국은 납치사건을개탄하며 이것은 테러행위"라고 말하는 등 강력한 어휘를 동원했다. 이 성명은 미국은 김대중씨의 안전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면서 그를 미국으로 초청하고 그의 `즉각적인 석방'을 촉구했다. 일각에서는 헨리 키신저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큰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 그가 한 일은 별로 없다고 레이너드는 덧붙였다. (워싱턴=연합뉴스) 김대영 특파원 kdy@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