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정액 1조원이 넘는 국내 ‘공룡 펀드’가 시장에서 사라졌다. 국내주식형 펀드를 찾는 투자자들이 감소하고 있다. 국내 주식형 펀드 투자자들이 줄줄이 해외주식형 펀드와 상장지수펀드(ETF)로 옮겨간 영향이다.

국내 액티브펀드 3년 새 9조원 이탈

신영밸류마저…마지막 1조원 펀드도 사라졌다
12일 펀드평가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신영밸류고배당펀드 설정액은 9996억원으로 집계됐다. 최근 1년 새 3500억원가량의 자금이 빠져나갔다. 이 펀드는 유일하게 남아 있던 설정액 1조원 이상 국내 주식형 펀드였다.

금융투자업계에서 ‘설정액 1조원’은 대형 펀드를 구분하는 기준점으로 통한다. 1조원 이상 펀드를 공룡 펀드로 부른 이유다. 하지만 코로나19 이후 불어닥친 개인의 직접투자 열풍, 해외 투자 확대로 하나 남은 공룡 펀드마저 이날을 기점으로 사라지게 됐다.

신영밸류고배당펀드는 2003년 5월 처음 설정됐다. 안정적으로 배당을 주는 기업, 기업 가치에 비해 저평가된 기업을 선별해 투자한다. 이 같은 전략으로 설정 이후 18년간 약 783%의 수익을 냈다.

5년 전만 해도 신영밸류고배당펀드 설정액은 3조원에 달했다. 같은 시기 KB밸류포커스펀드, 메리츠코리아펀드, 교보악사파워인덱스, 한국투자삼성그룹펀드 등 5개 공룡 펀드가 있었다. 2013년에는 총 10개, 2016년엔 8개의 국내 공룡 펀드가 존재했다. 그러나 이들의 몸집은 급격히 쪼그라들었다. 펀드 수익률에 실망하거나 거래에 불편함을 느낀 투자자들이 자금을 빼내간 영향이다. 2020년 8월 교보악사파워인덱스펀드마저 설정액이 9000억원대로 떨어지면서 신영밸류고배당펀드만 1조원 펀드에 유일하게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국내 액티브 주식형에서 최근 3년 새 빠져나간 자금만 9조8000억원에 달한다.

고민에 빠진 운용사들

국내 공룡 펀드가 자취를 감춘 사이 해외주식형 펀드들이 덩치를 키웠다. 현재 설정액 1조원 이상 해외주식형 펀드는 피델리티글로벌테크놀로지펀드, 한국투자글로벌전기차&배터리펀드가 있다. 3년 전만 해도 해외주식형 펀드의 경우 덩치가 큰 펀드 규모가 5000억원 수준에 불과했다. 중국, 베트남, 미국 등 빠르게 글로벌로 눈을 돌린 투자자들이 해외주식형 펀드를 찾았지만 국내 주식에 투자하는 펀드에 비해 규모가 크지 않았다.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상황이 달라졌다. 사상 최고치를 연일 경신하는 미국 시장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투자자들 가운데 직접 투자에 대한 두려움이 큰 이들이 비교적 안전한 펀드를 찾았다.

피델리티글로벌테크놀로지펀드는 올해 순자산이 3조원을 넘어설 만큼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글로벌 기술주에 투자하려는 투자자들이 이 펀드에 몰려든 영향이다. 2015년 설정돼 현재까지 242%의 누적 수익률을 기록 중이다. 한국투자글로벌전기차&배터리펀드도 국내 운용사가 운용하는 펀드 가운데선 약진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국내주식형 펀드의 자금을 가장 많이 뺏어간 것은 ETF다. 개인투자자들은 작년 한 해만 10조원에 육박하는 9조6347억원에 달하는 ETF를 순매수했다.

펀드에 대한 관심이 점차 사라지자 자산운용사들은 고민에 빠졌다. 업계 관계자는 “펀드 규모가 쪼그라들면서 자잘한 펀드를 다수 운용해야 하는 상황이라 규모의 경제를 이뤄내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펀드마다 별도 인력과 마케팅 투자를 해야 하는 만큼 비용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운용업계 관계자는 “점차 펀드보다는 ETF에 역량을 집중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펀드가 소멸하진 않겠지만 투자자들의 발길을 다시 되돌리긴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고 털어놨다.

박재원 기자 wonderfu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