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매매 취지와 달리 '투기판'으로 변질
정매꾼에 이어 M&A꾼까지 등장…상폐 종목 노려
결국 손실과 피해는 소액주주 몫, 묻지마 투자 피해야
넷플릭스 오리지널 '오징어 게임' 속 한 장면. /사진=넷플릭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오징어 게임' 속 한 장면. /사진=넷플릭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전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가운데 주식시장에서도 서바이벌 게임(?)이 벌어지고 있다. 바로 '정리매매'라는 제도다.

주식 투자자라면 한 번쯤은 정리매매를 들어봤을 것이다. 이 제도는 한국거래소에 상장된 종목이 상장폐지 결정을 받으면 7거래일 동안 투자자가 갖고 있던 주식을 처분할 수 있도록 하는 마지막 매매기회이다. 시장에서 정리매매를 두는 이유는 상장폐지 주식을 소유하고 있는 주주들에게 환금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사전적인 의미로는 긍정적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오징어 게임' 속 구슬치기와 징검다리 게임처럼 선택에 따라 순식간에 승자와 패자가 가려진다. 선택에 패배할 경우 가지고 있는 주식은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휴지조각이 된다. 정리매매 기간에는 상·하한가 제한이 없고 거래는 30분마다 한 번씩 이뤄진다. 상장폐지가 되고 나면 휴지조각이 될 주식이니 싼값에 거래되는 게 당연해 보인다. 하지만 실제 시장에서는 가격제한이 없다는 점 때문에 이상급등 현상이 반복된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오징어 게임' 속 한 장면. /사진=넷플릭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오징어 게임' 속 한 장면. /사진=넷플릭스

상장폐지가 임박한 기업의 주가가 크게 하락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단기차익을 노리고 뛰어드는 이른바 '정리매매꾼'(정매꾼)이 개입하기 시작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주가의 이상 급등 현상이 종종 일어나는데, 일부 세력은 정리매매를 통해 '헐값'에 경영권을 사들이기도 한다.
대박 아니면 쪽박?…정매꾼 유혹의 손짓
정리매매는 운이 좋으면 하루에 수십배의 수익을 얻을 수 있지만 정매꾼들이 손을 대기 시작하면 개인 투자자들은 '쪽박'을 찰 수 있다. 정매꾼들은 다른 투자자들과 함께 팀을 이뤄 상장폐지 기업의 정리매매 첫날을 공략한다. 통상 정리매매 첫날 주가가 많이 오른다는 점, 30분에 한 번씩 거래가 체결되는 단일가매매방식이 적용된다는 점을 악용한다.

정매꾼들은 호가를 올려 주가가 계속 오를 것이란 신호를 준 뒤 추격매매를 유도하고 주가가 급등하면 바로 팔아 시세차익을 얻는다. 정리매매 주식은 통상 10분의 1 수준 주가에서 거래되고, '동전주'인 경우도 많다. 때문에 가격이 조금만 올라도 상승률이 높아지는 왜곡 현상이 발생한다.

정리매매 기간 중 주주들의 절박한 심정을 악용한 사기 사건이 종종 발생하기도 한다. 2016년 감사의견 거절을 받아 증시에 퇴출된 아이팩토리는 정리매매 당시 관계사인 아이카이스트가 소액주주들의 피해를 최대한 보전해주기 위해 아이팩토리 주식을 주당 5000원에 매입해주겠다고 했다.

이를 믿은 주주들은 주식을 팔지 않았고, 5000원 이하에선 오히려 주식을 더 사기도 했다. 그러나 아이카이스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고, 이 회사도 결국 경영진의 횡령으로 폐업했다.

이처럼 투자 위험이 높음에도 투자자들이 상장폐지 종목의 정리매매에 뛰어드는 이유는 '잘하면' 단시간 내에 수익을 낼 수 있다고 봐서다. 정리매매에 뛰어드는 개인 투자자들은 가격제한폭이 없어 급등락을 보이는 만큼 저점에 들어갔다 고점에 나오면 수익을 올릴 수 있다고 본다.

전문가들은 대부분의 투자자들은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증권가에선 정리매매 종목 거래는 '폭탄 돌리기'와 다름 없다고 경고한다. 금융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정리매매 취지와 다르게 일부 종목에선 투기판으로 변하고 있다"며 "상장폐지가 된 이유가 있는 만큼 정리매매 기간 묻지마 투자는 피하는 것이 좋다"고 말했다.
주식시장 하이에나, 정리매매 노린다…헐값 경영권 인수
정리매매에 들어간 상장사의 경영권을 헐값에 인수하는 사례도 있다.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상장폐지 후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자산을 노렸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회사를 청산한 뒤 매각해 거둘만한 자산들이 많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통상 정리매매에서 경영권을 사들이는 세력들은 회사를 인수해 회생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지만, 금융투자업계에서는 회사를 인수한 뒤 관련 자산을 매각해 차익을 보려는 것 아니냐는 의혹을 보낸다. 이 경우 회사의 자산에만 집중할 뿐 부채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다. 회사의 부채상환에는 관심이 없고, 자산만을 신속하게 청산해 이익을 취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사진=게티이미지뱅크

회사의 자산을 매각한 자금은 회사의 공금이 된다. 이 자금은 회사가 상장폐지 전문가들이 선임된 이사진들에게 대여 또는 투자의 형식으로 현금으로 집행이 된다. 통상 상장폐지가 결정되는 순간 과반수 이상 지분을 확보할 경우 경영자들은 모든 의결 사항을 합법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

이사회가 아닌 주주총회 의결사항으로 처리할 경우 경영진들의 부담은 크게 줄어든다. 만약 정리매매 시에 지분을 인수해 최대주주에 오르면 작은 비용을 투입해서 큰 결정권과 집행권을 소유하게 되는 셈이다.

반면 회사 장부를 확인하기 위해 정리매매 때 주식을 사들이는 경우도 있다. 지난 5월 증시에서 퇴출된 F사는 정리매매 당시 한 주체에서 70% 넘는 지분을 확보했다. 이들은 F사의 상장폐지 원인이 기존 최대주주에 있다고 판단, 회사의 부정 행위를 장부에서 찾기 위해 주식을 대거 사들였다는 이야기가 돌기도 했다.

실제로 F사의 실소유주로 알려진 A씨는 F사와 관련해 '고의 상장폐지' 의혹이 불거진 바 있다. 이에 F사의 한 주주는 실소유주인 B씨를 비롯해 관계자 5명을 업무상 횡령 및 배임 혐의로 서울남부지검에 고소했다.

M&A업계 한 관계자는 "상장폐지된 기업을 노리는 세력은 정리매매 기간에 51%이상의 지분율을 확보한 뒤 회사의 주요한 의사결정권을 장악하는 경우가 많다"며 "통상 최대주주 오른 후 회사자산 매각 이익 챙기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류은혁 한경닷컴 기자 ehryu@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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