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예진(27)이 연기 인생에서 가장 어두운 배역을 맡았다. 스릴러 화제작 '백야행'(19일 개봉)에서 과거의 멍에를 진 채 무시무시한 살인 사건에 깊숙이 발을 담근 '미호'로 나온다. '아내가 결혼했다'의 불륜녀,'무방비도시'의 소매치기 역도 해봤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미호는 흔한 악녀가 아니라 연민을 불러 일으키는 이중성격의 소유자.그래서 손예진은 여태껏 가장 힘든 연기였다고 고백했다. 12일 삼청동 한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기자들과 함께 시사회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완성작을 처음 봤어요. 지난해 '아내가 결혼했다'로 여러 상을 받은 이후 여서인지 부담감이 컸습니다. 제 생애에 가장 정적이고 어두운 캐릭터라 걱정도 앞섰고요. 퇴폐적인 악녀가 아니라 이중적인 악녀거든요. 지나치게 절제된 연기는 안한 거와 같고 오버하면 '왜 저래'란 반응이 나올 수 있거든요. 그 가운데에서 적정선을 지키는 게 힘겨웠어요. "

'백야행'은 일본의 미스터리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만든 스릴러.한 남자의 살인 사건을 수사하던 형사(한석규)가 14년 전 발생한 살인사건과 연관돼 있음을 눈치채고 당시 피살자의 아들이던 요한(고수)을 추적한다. 비슷한 시기,재벌총수는 미호와 약혼하지만 그녀의 뒤를 캐도록 비서실장에게 지시한다. 시간이 흐르면서 두 이야기는 한 지점으로 수렴된다.

"미호가 뼛속까지 악녀로 그려진 소설 그대로였더라면 출연하지 않았을 수도 있어요.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을까 싶은,소름끼치는 캐릭터였거든요. 그러나 영화에서 미호는 단지 지탄받아야할 대상이 아니예요. 관객들에게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인물로 바뀌었거든요. "

영화는 단지 범인을 잡는 데 그치지 않는다. 등장인물의 사연을 들춰내고 어른들이 저지르는 원죄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상처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상처는 상대적인 거잖아요. 남들이 보기에는 하찮아도 자신에게는 가장 큰 상처로 남을 수 있는 거지요. 미호는 상처를 치유하고 행복을 찾으려 하지만 그녀가 바라보는 행복이 왜곡된 거지요. "

그녀가 맡은 미호는 영화 속에서 늘 가식적인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언제나 새하얀 드레스를 입는다.

"미호는 청바지를 입을 수 없는 인물이거든요. 어두운 내면과 달리 겉으로는 고고하고 눈부신 삶을 추구하는 비현실적인 존재이니까요. 반면 상대역 요한은 어둠 속에 갖힌 존재여서 늘 검은색 옷을 입고 등장해요. 미호가 마지막 장면에서 하얀 모피의 깃털을 뒤로 흩날리며 참혹한 현장을 유유히 떠나지요. 화려한 옷은 그처럼 가식적인 캐릭터를 만들기 위한 장치였어요. "

베드신도 마찬가지다. "베드신에서 미호의 약혼남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아요. 전혀 다른 장소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을 교차 편집했거든요. 섹스하는 미호의 얼굴도 환희나 희열을 느끼는 모습이 아니죠.마음이 섹스 행위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의미죠.그렇다고 싫은 표정을 지을 수도 없었죠.관객들이 '뭔가 있구나' 눈치채니까요. "

그녀의 베드신은 '아내가 결혼했다''무방비도시' 이후 세 번째.이번에도 사실과 달리 '가슴노출' 사고 운운하는 기사가 떠 속이 상하지만 배우의 숙명으로 받아들인다고.

손예진은 "차기작은 가볍고 재미있는 배역을 선택할 것"이라면서도 "미호처럼 매력있는 캐릭터라면 언제든 다시 도전해볼 것"이라고 말했다.

유재혁 기자 yooj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