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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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FT(대체불가능토큰) 열풍이 뜨겁다. 지난해 글로벌 NFT 거래량이 150억달러를 넘었을 정도다. 이 정도 규모는 오픈씨(OpenSea) 같은 NFT 거래소에서 무엇을 사더라도 원하면 언제든 팔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낙관론자들은 NFT의 성장은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말한다. NFT는 메타버스 세상의 핵심 자산이자, 블록체인과 가상화폐 활성화를 촉발할 매개체로 인식되면서 무한한 가능성을 인정받고 있다. 금융 시장에선 벌써부터 NFT를 활용한 트러스트 스와프(Trust Swap) 등의 신종 금융 기법들이 등장했다. 메타버스라는 현실과 구분이 어려운 가상 세계 속 디지털 금융을 가능케 하는 핵심 수단으로서 NFT가 주목받고 있다는 얘기다.
21세기 튤립인가, 새로운 부(富)의 상징인가
NFT에 대한 열광의 근원은 희소성이다. ‘세상에서 단 하나뿐이며, 복제 불가능한 원본’이라는 믿음은 매혹적일 수밖에 없다. 지난해 3월 ‘얼굴 없는 화가’로 불리는 뱅크시의 ‘멍청이’(Morons)라는 작품이 불에 태워지고, 대신 NFT로 변환된 디지털 작품이 경매에 올라온 사건은 NFT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웅변한다. 블록체인 회사인 인젝티브프로토콜은 마치 ‘쇼(show)’ 같은 행위를 전 세계에 알린 덕분에 뱅크시의 NFT 그림을 약 4억3000만원에 팔았다.

인류는 늘 희소가치에 집착했다. 현대 화폐 제도도 금이라는 희소 광물에 대한 ‘합의된 신뢰’에서 출발했다. 17세기 네덜란드 금융 시장을 휩쓸었던 튤립 투기의 시작도 희소성이었다. 다년생 식물인 튤립은 다른 새 구근을 만들기까지 몇 년이 걸리는 데다 가끔 돌연변이를 만들어 내 애호가들을 현혹했다. 해상 무역으로 신흥 제국주의 국가로 부상한 네덜란드엔 차고 넘칠 정도로 돈이 많았고, 전에 없던 엄청난 유동성은 튤립 구근이라는 부(富)의 상징으로 미친 듯이 쏠렸다.

NFT는 21세기판 튤립인가, 아니면 부의 가치를 저장하는 새로운 수단인가. 일각에선 NFT를 신종 폰지 사기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아무런 가치도 없는 물건을 마치 엄청난 가치가 있는 것처럼 현혹함으로써 일종의 ‘돌려막기’를 하고 있다는 논리다. 이들의 시선에서 볼 때 보어드에입스, 클립토펑크 같은 유명 NFT 미술품들은 폰지 사기를 부추기는 대표 상품일 뿐이다. NFT는 한때 네트워크 마케팅이라고 불렸던 다단계 판매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다.
NFT의 확장 가능성, 글로벌 '돈 잔치' 종말을 견뎌내야
NFT를 ‘사기’로 보는 시각은 기본적으로 뱅크시가 미술 평단과 수집가들을 조롱하는 논리의 연장선에 있다. 뱅크시는 2018년 소더비에서 ‘소녀와 풍선’이란 작품이 경매에서 낙찰된 순간 ‘원본’을 파괴했다. 그는 2006년부터 ‘모론즈’ 연작을 통해 끊임없이 미술 시장의 자본주의 논리를 풍자하고 조롱했다. 그의 조롱과 파괴가 거꾸로 그의 명성과 작품의 가치를 더 올리는 역설이 발생하긴 했지만, 어쨌든 뱅크시는 미술계에 만연한 허위와 조작을 경멸했다.

얼마 전 오픈씨 거래를 통해 10억원 상당의 NFT 미술품을 보유하고 있다는 지인을 만났다. 그는 스타트업으로 자수성가한 한국의 ‘영 리치(Young Rich)’ 중 한 명이다. 테슬라, 아마존 같은 미국 대형주에 일찌감치 투자해 본업보다 더한 돈을 벌었다. 그에게 왜 NFT 미술품에 투자하는지를 물었다. 그의 답변은 의외로 간단했다. “NFT의 핵심은 크레딧(신뢰)에요. 한 점당 수억원을 호가하는 명화(名畵)의 가치를 누가 정하죠? 보어드에입이나 크립토펑크의 NFT를 몇억에 거래할 수 있는 것도 똑같은 논리에요”

미술품이 고가의 상품으로 거래되기 시작한 결정적인 계기는 유럽의 르네상스였다. 그전까지 중세의 미술은 경배와 찬양을 고양하는 매개체였다. 르네상스의 문예 부흥이 미술에 대한 시각을 완전히 바꿔놨다. 작품은 상품으로, 미술가는 상품 공급자로 재정의됐다. 미술품의 가치는 누가 소유하고 있는지에 좌우됐다. 피렌체의 대상인(大商人)인 코지모 데 메디치가 효시 격이다. 그는 가문의 대저택에 엄청난 미술품들을 소장하고, 작가들을 후원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가 메디치 가문의 수혜를 입었다.

한국 미술 시장도 마찬가지 논리가 지배하고 있다. 고 김종필 총리가 작고했을 때 자녀들이 그의 소장품들을 경매하려고 내놓으려다 위작들이 너무 많아 깜짝 놀랐다는 얘기는 미술계의 유명한 일화다. 삼성가(家) 오너들의 소장품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작품의 진위를 의심받지 않는다. 작가들이 거대 갤러리들의 우산 아래로 들어가려고 무던히 애를 쓰는 것도 이 같은 미술 시장의 논리를 잘 알고 있어서다.

NFT 역시 가치의 경중은 누가 소유하고 있는지에 좌우된다. 저스틴 비버 같은 수천억 자산을 보유한 유명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들이 현대의 메디치다. 다만, 수집 대상이 ‘모나리자’에서 ‘크립토펑크’로 바뀌었을 뿐이다. NFT를 생산하는 인비져블 프렌즈, BAYC, 크립토펑크 등 유명 ‘작가 집단’들은 소위 ‘화이트 리스트’를 만들어 그들의 작품을 가장 먼저 구매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다. 유명 NFT 작품을 보유한 이들은 ‘그들만의 리그’에 속해 있다는 만족감과 새로운 물결에 누구보다 빨리 올라탔다는 우월감에 NFT의 가치를 의심치 않는다. 게다가 언제든 현금화도 가능하다. 소유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다만, 한 가지 지적해야 할 것이 남아 있다. NFT가 ‘튤립 광풍’의 재현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면 아직 관문이 하나 남아 있다. 고삐 풀린 글로벌 유동성 시대가 막을 내리더라도 NFT가 거래가 지금처럼 활발할 수 있을 것이냐의 논란이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너도나도 만들어내는 NFT는 튤립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마구 찍어낸 화폐는 한낱 종잇조각일 뿐이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