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기술(IT)업계의 구인난이 한층 더 심해졌다. 임금을 더 주는 대기업으로 이직하는 개발자가 늘어난 영향이다. IT 기업이 밀집한 경기 성남시 판교역에 한 모바일 부동산 업체의 채용 광고가 붙어 있다.  /신경훈 기자
정보기술(IT)업계의 구인난이 한층 더 심해졌다. 임금을 더 주는 대기업으로 이직하는 개발자가 늘어난 영향이다. IT 기업이 밀집한 경기 성남시 판교역에 한 모바일 부동산 업체의 채용 광고가 붙어 있다. /신경훈 기자
‘8.5%.’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이 지난달 확정한 올해 임금 인상 요구율이다. 최근 4년 만의 최고 수준이다. 2019년 7.5%, 2020년 7.9%, 지난해 6.8%를 훨씬 뛰어넘는 수치를 제시한 이유에 대해 한국노총은 최근 물가 상승폭을 반영했다고 설명했다. 임금 인상 요구율은 한국노총 산하 노조가 임금 교섭에서 참고자료로 활용한다.

거세지는 임금 인상 요구

2일 경제계에 따르면 올해 주요 기업의 임금 부담이 한층 커질 전망이다. 물가 상승으로 가계 살림이 팍팍해진 근로자들의 요구를 앞세워 각 기업 노조가 일제히 큰 폭의 임금 인상을 요구할 것이란 시나리오다. 일각에선 ‘원자재 가격 상승→물가 상승→임금 상승→물가 추가 상승’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시작됐다는 분석도 나온다.

카카오는 올해 임직원 인건비 예산을 전년 대비 15% 늘리기로 했다. 이에 따라 카카오 임직원은 기본급을 최소 500만원 더 받게 됐다. 다른 대기업들도 근로자에게 과거보다 많은 보상을 해주고 있다. SK하이닉스는 작년 말 기본급의 300%에 올초 1000%를 추가로 지급했다. 삼성전자는 최근 반도체 등 DS(디바이스솔루션)사업부에 연봉의 50%를 보너스로 줬다. DS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메모리사업부는 기본급의 500%를 추가로 받았다.

기업들이 임금을 큰 폭으로 올린 것은 물가 상승과 부동산 가격 급등 등으로 불만이 팽배해 있는 직원들을 달래기 위해서다. 일부 고위 임원들만 수십억원 규모의 연봉을 받는 데 대한 비판이 노골화됐다는 점도 감안했을 것이란 분석이다. 한 기업의 인사 담당 임원은 “임금 인상 없이는 수천 명의 직원을 기업 영업전략에 결집시키기 힘들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임금 인상 흐름은 전체 근로자의 임금 통계에도 반영되고 있다. 고용노동부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한국 전체 근로자의 월평균 임금은 372만9000원으로 전년 같은 기간보다 5.2% 올랐다. 전년 동기 대비 증가율로 따지면 2020년 1분기 후 최고 수준이다.

제품 가격도 ‘인상 도미노’

전문가들은 대기업을 중심으로 한 임금 인상이 물가 상승 속도에 불을 붙일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LG전자의 공시 보고서에 따르면 TV 평균 가격은 지난해 3분기 기준 전년보다 22.2% 급등했다. 냉장고·세탁기의 평균 판매가격은 같은 기간 6.3% 올랐다. 에어컨도 같은 시기 9.6% 상승했다. 삼성전자의 3분기 TV 평균 판매가격은 전년 대비 약 29%, 스마트폰·태블릿PC 가격은 5% 높아졌다.

가전업계 관계자는 “올해도 가전제품 가격이 오를 가능성이 크다”며 “특히 기업들이 수익성 확보를 위해 프리미엄 제품을 중심으로 영업 전략을 짜고 있어 가격 상승 추세에 불을 지피고 있다”고 말했다.

현대자동차도 비슷한 이유로 올해 차량 가격을 올릴 수밖에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올해 현대차 노조는 연봉 인상을 강하게 요구하고 있다. 지난해 말 새로 들어선 강경 성향의 집행부는 현행 750%인 상여금을 800%로 늘리는 한편 이를 모두 통상임금에 포함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업계에선 올해 현대차의 신차 가격이 작년보다 5%가량 오를 것으로 보고 있다. 통상 1%, 많아야 2%가량 올랐던 이전과 비교하면 큰 폭의 상승이다.

한국은행은 이 같은 상황을 반영해 올해 물가 상승률 전망치를 최근 3.1%로 상향 조정했다. 올해 월간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2011년 12월(4.2%) 후 10년여 만에 처음으로 4%대에 진입할 가능성도 점쳐진다. 소비자물가는 지난해 10월(3.2%) 9년8개월 만의 3%대 상승률을 기록한 뒤 1월까지 넉 달째 3%대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박영범 한성대 교수는 “물가 상승에 따른 임금 인상 요구가 한층 더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며 “기업들이 비용 부담을 제품 가격에 전가하면 물가 상승과 임금 인상의 악순환이 계속 반복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신영/김일규/황정환 기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