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親日로 몰릴라"…입 닫은 전문가들
“국가 원로와 지식인, 학자들이 백가쟁명식 토론을 벌여야 해요. 무슨 얘기든 해서 전략부터 짜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은 다들 입을 다물고 있으니 정말 답답합니다.”

‘외환위기 이후의 한국 경제’ 재건을 주도했던 진념 전 부총리가 한·일 갈등 국면과 관련해 가장 개탄한 건 ‘토론의 실종’이었다. 지난 6일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다. 각 분야 전문가가 머리를 맞대고 실질적인 해법을 고민해도 모자랄 판인데 공론장에는 정치인들의 감정적 수사(修辭)만 가득하다는 게 그의 질타였다.(본지 8월 7일자 A1, 4면 참조)

경제 원로의 말이 주는 울림이 평소보다 깊었던 건 최근 들어 재계 인사는 물론이고 학자, 전직 관료 등을 포함해 오피니언 리더들이 한·일 갈등과 관련해 말을 아끼고 있어서다. “미안하지만 당분간 이런 사안에 대해 노코멘트하기로 했다. 이해해달라”(A 전직 장관)거나 “나는 외교가 아니라 통상 전문가다. 한·일 경제전쟁은 외교 전문가가 답해야 할 사안”(B 교수)이라는 답변은 그나마 나았다. 일본이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수출절차 간소화 국가)에서 제외한 직후부터 아예 전화를 꺼놓거나 받지 않는 이가 대부분이었다.

민감한 사안에도 거침없이 목소리를 내던 전문가들이 갑자기 입을 굳게 다문 이유는 뭘까. 서울지역 한 사립대 교수는 “대중이 무섭다”고 털어놨다.

그는 최근 한 언론 인터뷰에서 “정공법으로는 일본과의 경제전쟁에서 이기기 힘드니 신중하게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가 ‘친일 교수’라는 악성 댓글과 이메일에 시달렸다. 그는 “연구실에까지 욕설 섞인 항의 전화가 쏟아져 응대하는 대학원생들이 상처를 많이 받았다. 주변 사람에게 더는 피해를 주고 싶지 않다”며 인터뷰를 거부했다.

전문가들이 침묵하면서 ‘어떻게 이길 것이냐’는 논의는 사라졌다. 토론이 없으니 정부의 대응도 1차원적일 수밖에 없다. 한 통상 전문가는 “정부가 일본 식품 수입이나 관광 규제 같은 카드를 공개한 건 치명적인 패착”이라며 “정부가 공식적으로 보복 입장을 표명하는 바람에 향후 일본에 트집 잡힐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이 자유롭게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면 정부가 이 같은 ‘기초적인 실수’를 저지르진 않았을 것이란 게 그의 설명이다.

들불처럼 타오른 반일 감정이 쉽게 꺾이지 않을 기세다. 청와대 안팎에서는 “지금 중요한 것은 애국이냐 이적(利敵)이냐다”는 살벌한 말까지 나온다. 이런 상황일수록 지혜와 소신을 밝히는 지식인들의 용기가 필요하다. 사회를 위한 책무이기도 하다. “전문가들이 침묵하는 건 국가와 역사에 죄를 짓는 것”이라는 진 전 부총리의 일갈을 새겨들을 때다.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