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역결제 '안방' 내주는 시중銀 "삼성전자 수출어음 받아가라"
5년내 자본금 못늘리면
현대차 등 다른 대기업도 외국은행에 뺏길 우려
시중은행들의 기업 여신담당자들 사이에선 최근 최우량 기업 고객인 삼성전자를 비롯한 삼성 계열사들을 경쟁 은행에 보내는 이상한 진풍경이 연출되고 있다. 이들 기업의 수출 물량은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데 비해, 은행들의 자본력이 부족하다 보니 수출에 수반되는 무역금융을 제대로 소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은행들, 외화자금 경색 우려
은행법상 은행들은 자기자본의 25%(동일인 여신한도)까지만 그룹 계열사에 여신, 매입외환 등으로 내줄 수 있다. 최근 문제가 되는 것은 기업들이 수출할 때 발생하는 매입외환이다. 수출기업에 미리 돈을 내주고 나중에 수입업체에서 돈을 받는 만큼 동일인 여신한도에 포함된다. 수출이 늘어날수록 매입외환 규모도 늘어난다. 이를 수용하려면 자기자본도 같이 늘어야 하는데 은행들의 자기자본은 제자리걸음이다. 이러다 보니 두 눈 뜨고 삼성전자 같은 우량기업을 외국계 은행에 빼앗기고 있다.
이에 따라 한때 수출강국의 밑바탕이 됐던 국내 은행의 무역금융 능력이 글로벌 기업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취약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 같은 기업들이 해외시장을 개척하는 동안 국내 은행들은 국내에서 소매금융에 안주해온 결과라는 비판이다.
무역금융시장을 외국계 은행들에 빼앗기면서 국내 시중은행들의 외화자금 경색 우려도 나오고 있다. 한 시중은행 임원은 “매입외환 등 무역금융을 통해 공급받는 외화자금 규모가 상당한데, 이 시장을 외국 은행이 가져가면 그만큼 확보할 수 있는 외화자금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다른 기업도 외국계에 뺏길 판
문제는 앞으로 몇년 안에 삼성뿐 아니라 다른 대기업들도 시중은행들의 동일인 여신한도로 인해 외국계 은행들을 활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바젤은행감독위원회가 자기자본에 대한 기준을 강화하고 있어서다.
동일인 여신한도의 기준이 되는 자기자본은 보완자본과 기본자본으로 구성된다. 2013년 말 기준 시중은행들의 자기자본 180조원 중 18%가량이 보완자본이다. 바젤은행감독위원회는 2019년부터 동일인 여신한도를 산정할 때 보완자본을 빼기로 했다. 이에 따라 삼성뿐 아니라 현대자동차 SK와 같은 그룹도 동일인 여신한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관측이 나온다.
시중은행들은 동일인 여신한도 기준을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우량기업의 경우 매입외환을 여신한도에서 빼자는 제안이다. 한 시중은행 임원은 “삼성전자의 경우 기껏해야 한 달이면 매입외환 금액을 상환받을 수 있는데, 이 금액 전체를 동일인 여신한도로 잡는 것은 무리”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감독 당국도 국내 대기업들의 동일인 여신한도 실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인식이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시중은행들의 이 같은 애로사항을 살펴본 적이 없어 이 같은 문제가 있는 줄 몰랐다”며 “실태 파악을 해서 해결 방안을 찾겠다”고 말했다.
■ 매입외환
은행이 사들인 수출환어음 무역환어음 등을 말한다. 은행은 수출환어음 등을 사들이면서 수출업체에 수입업체 대신 돈을 미리 지급한다. 이 돈은 나중에 수입업체로부터 상환받는다. 수출업체에 돈을 일정 기간 빌려주는 형식이어서 여신으로 간주한다.
■ 동일인 여신한도
같은 사람이나 법인에 은행들이 빌려줄 수 있는 여신 한도. 한 사람이나 기업에 여신이 집중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도입됐다. 여신 뿐 아니라 어음, 매입외환 등도 포함된다. 대기업 계열사들의 여신한도는 은행 자기자본의 25%, 개인과 개별 회사는 20%다.
박신영/박한신 기자 nyuso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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