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 회장이 삼성계열 동양방송 이사로 있던 1974년. 이 회장은 파산 위기에 직면한 한국반도체를 반드시 인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천연자원이 부족한 한국이 살 길은 반도체 같은 첨단산업에 뛰어드는 것밖에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당시 삼성전자 경영진은 “TV 하나 제대로 못 만드는 형편에 최첨단으로 가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며 반대했다. 삼성 밖에서도 “반도체 왕국 일본을 옆에 두고 ‘안될 일을 하고 있다’”는 비웃음으로 가득했다.

‘삼성전자 차원의 인수는 안되겠다’고 생각한 이 회장은 결국 그해 12월 사재를 털어 한국반도체를 인수했다. 이후 일본이 6년이나 걸려 개발한 64K D램을 6개월 만에 만들면서 인수 20년 만인 1993년 삼성전자를 세계 1위 메모리반도체 회사로 키워냈다.

이런 집념이 바탕이 된 덕에 “삼성을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만들겠다”는 이 회장의 꿈은 이뤄졌다. “그의 지식과 통찰력은 곧 실천이며 행동”이라는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의 평가대로 이 회장은 늘 불가능할 것 같았던 목표를 이루고야마는 경영인이었다.

그런 그가 올 1월 신년사에서 내놓은 화두는 ‘국민기업’. 2002년 1월 “삼성은 국민의 기업임을 한시라도 잊지 말고 국민 기업으로서 더욱 분발하자”고 한 뒤 꼭 10년이 지나 다시 전면에 내세웠다.

삼성이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하긴 했지만 존경받는 기업이 되지는 못했다고 판단해서다.

이 회장은 1993년 ‘신경영’을 주창할 때부터 “기업은 눈에 안 보이는 책임까지 다해야 한다”며 기업의 사회적 책무를 강조했지만 2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여론은 삼성에 우호적이지만은 않다.

편법 승계와 무노조 경영으로 공격받고 ‘나홀로 독주’로 인해 질시 대상이 되고 있다. 대선 정국에선 ‘대기업 때리기’로 변질된 경제민주화의 주요 표적으로 자리잡았다.

전삼현 숭실대 법학과 교수는 “국민들은 세계에서 삼성이 이룬 성과를 보고 자부심을 느끼면서도 국내에선 부를 독점하는 재벌로 인식하고 있다”며 “삼성이 지속적으로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준법경영을 엄격히 이행할 때 이런 이중성을 조금씩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인설 기자 surisur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