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구매팀 '상생 스트레스'…"요즘 협력사에 전화도 못해"
"대기업 구매팀이 갑이라고요? 요즘은 화법교육도 하는데요. "

국내 전자업체 A사의 박모 구매팀장은 최근 팀원들에게 '예절교육'을 실시했다. 협력업체를 방문하거나 전화통화를 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불필요한 오해'를 줄이기 위해서다. 박 팀장은 "회사 측이 중소기업과의 상생협력을 인사고과에까지 반영하겠다고 해 팀원들에게 주의를 주기 위한 취지"라고 말했다.

대기업 구매 담당 직원들 사이에서는 상생협력을 강조하는 요즘 분위기가 '스트레스'로 작용하고 있다. 정부가 직접 상생협력을 챙기면서 회사 차원에서 자체 감사에 나서고,협력업체 직원들과 술자리 금지령까지 내리는 등 단속이 부쩍 강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상생, "말조심부터 시작"

A사는 직원들에게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금지어' 리스트를 나눠줬다. 예컨대 무심코 인사치레로 할 수 있는 "요즘 실적이 좋으시다면서요?" "언제 밥 한번 하시죠" "요즘 뜸하시네요"와 같은 표현들은 금기사항이다. 상생협력이 강조되는 상황에서 협력사들이 직원들의 전화응대 태도를 문제삼는 일이 곧잘 생기고 있어 이 같은 '화법 교육'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B사는 올 추석을 앞두고 '선물 금지령'을 내렸다. 또 협력사가 구매 부서 직원의 선물 강요 사례를 제보할 수 있도록 홈페이지에 '사이버 신문고' 코너도 개설했다. 이 회사 관계자는 "협력사의 홍보용 넥타이까지도 금지 대상 품목에 들어있다"며 "이번에 걸리면 인사상 불이익이 클 거라는 생각에서 동료 중에는 신혼여행을 떠날 때조차 협력사에 '자리를 비운다'는 말을 못한 사람도 있다"고 전했다.

또 자체 감사가 늘어나는 것도 구매 부서 직원들에게 스트레스다. C기업은 상생협력 현황을 점검하자는 차원에서 구매팀 직원들을 대상으로 감사를 실시했다. 전화 응대태도,협력사 방문 횟수까지 샅샅이 조사했다. 이 회사 구매전략실장은 "협력사에서 부품을 조달받지 않으면 사업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의존도가 높아 실제로는 우리가 '을'임에도 감사팀이 '향응접대'나 받는 사람들로 취급해 사기저하를 호소하는 직원들이 적지 않다"고 말했다.

◆단가 재조정 요구에 시달려

대기업 석유화학 A계열사 국내 영업팀에서 일하는 김문철 차장(40 · 가명)은 기존 거래선인 중소기업 구매팀에서 하루 10통에 가까운 전화를 받는다. "요즘 정부 분위기를 고려해서라도 원료 가격을 낮춰달라"는 것이 전화통화 내용의 대부분이다. 석유화학 원료를 생산해 중소기업에 공급하고 있는 A사 입장에서는 난감한 요구다.

김 차장은 "일부러 전화를 받지 않거나 휴가 중이니 다음에 연락하자는 식으로 전화통화를 마무리한다"며 "이미 계약을 맺은 물량에 대해서도 계약 가격을 다시 산정해달라는 막무가내식 요구를 들으면 정말 괴롭다"고 말했다.

김현예/이정호 기자 yea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