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9월 위기설'을 시작으로 해서 올해 초까지 끊임없이 괴롭혔던 각종 위기설들은 아마도 우리에게 '위장된 축복'이었는지 모른다. 멀쩡하던 환율을 달러당 1500원 이상으로 끌어올렸으니 말이다. 기러기 아빠와 수입상,키코 거래기업에 엄청난 고통을 안겨줬지만 그 덕분에 우리 경제는 글로벌 경제위기 속에서 순항하고 있다. 사상 최대의 월간 무역흑자를 기록했고 종합주가지수는 지난 9월 미국의 리먼브러더스 파산 이전 수준을 거의 회복했다. 문을 연 아파트 모델하우스마다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다.

하지만 비정상적으로 높았던 환율은 계속될 수 없었다. 한때 1570원 선까지 올랐던 원 · 달러 환율은 1200원대로 주저앉았다. 지난 두 달 새 20% 가까이 폭락했다. 아시아 국가들의 대규모 무역흑자를 가능케 했던 미국의 과소비 체제가 무너진 상태에서 우리만 고(高)환율로 가면서 무역흑자를 냈던 축복은 이제 막을 내리고 있다.

환율이 대세하락 쪽으로 기울었다면 달러투매 현상이 당분간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 가파르게 떨어지는 환율에 대비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었느냐 하는 게 새로운 의문이다.

선물환이나 통화옵션상품은 환율 변동에 따른 위험을 효과적으로 회피할 수 있는 훌륭한 수단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무기들을 내던져버렸다. 환헤지라는 것은 손실을 줄이거나 이익을 더 내기보다는 불확실성을 없애는 것이 목적인데도 상당수 기업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키코와 같은 상품으로 이익을 봤다는 얘기가 나돌자 이 상품에 너나없이 뛰어들었고,이로 인해 큰 손해를 보자 아예 거들떠보지 않고 있다. 키코 피해기업들로부터 소송을 당한 은행들 역시 외환파생상품 거래를 기피하고 있다. 그 결과 국내기업들은 환율하락 위험에 고스란히 노출돼 있다.

환율 하락으로 수입물가가 안정될 것이라는 기대도 믿을 바가 못 된다. 원자재 가격지수인 로이터제프리스CRB지수는 3월 이후 16% 상승했다. 국제유가는 이 기간 중 35%나 올랐다. 무역흑자 기조가 흔들릴 가능성이 크다.

내수 소비로 통계가 잡혀 있지만 실제로는 환율 효과인 외국 관광객들의 국내 소비 역시 퇴장할 운명이다. 일본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 서울 명동거리와 유명 백화점에서 일본인들을 찾아보기가 점점 어려워질 것이다. 우리 국민이 외국에 나가 돈을 쓰는 것을 걱정해야 할 때가 다시 오고 있다.

그나마 위안은 슈퍼 추경예산이다. 저금리와 함께 한국 경제를 쌍끌이해온 고환율의 공백을 재정이 메워야 할 차례다. 하지만 28조4000억원의 추경예산 약효는 올해로 끝난다. 환율이 지난 6개월을 이끌었다면 재정 역시 앞으로 6개월 정도 버텨줄 것이다. 그 약발이 다 떨어지기 전에 또다른 엔진을 찾아야 한다.

후대가 갚아야 할 재정에 그 짐을 또다시 안겨서는 안 된다. 민간부문이어야 한다. 사람들이 돈 냄새를 맡고 있는 곳에서 사업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금융이나 교육 의료 레저 관광 등 서비스 분야가 그런 곳이다. 결국 서비스업 규제완화 문제로 되돌아오게 된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해법으로 제시했지만 수많은 반대에 부딪쳐 진척되지 못하고 있는 사안이다. 이번에는 풀어야 한다. 시간이 별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