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가 총체적 위기에 빠져들고 있다. 당초 지난 1월 발발 및 조기종결될 것으로 기대됐던 미국-이라크전쟁이 지연되면서 내수 및 설비투자 위축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고 여기에 북한 핵문제가 돌출돼 한반도를 둘러싼 지정학적 상황이 경제를 짓누르고 있다. 또 신용카드 부실로 촉발된 가계부실이 자칫 개인 및 금융부문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고 SK 분식회계 문제는 한국기업의 회계 불투명문제를 다시 부각시켰다. 이에 따라 무디스 등 국가신용평가기관들이 한국에 대한 국가신용등급을 하향조정할 가능성이 점차 높아지고 있어 정치권과 정부차원의 적극적인 대책마련이 절실한 상황이다. ◆ 대외 악제에 경제 '흔들' 한국경제위기를 거론할 때 주원인으로 언급되는 이른바 '대외적 불확실성'은 두말할 것 없이 '미국의 이라크침공 가능성'과 '북한 핵문제'다. 이중 미국의 이라크침공 가능성은 단기전일 경우 호재로까지 전망되고 있고 소규모 개방경제인 한국만 겪을 사태는 아니기 때문에 유독 한국에 집중되는 대외불안요인으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반면, 북한 핵문제는 벗어날 수 없는 한국만의 '국가위험(Country Risk)'이다. 북한이 미국을 겨냥한 장거리 미사일개발을 완료했다거나 핵무기 생산을 위한 플루토늄 재처리를 시작했다는 부동의 증거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음에도 '핵시설에 대한 외과수술적 공격(Surgical strike)론' 등 위기조장적 발언이 한반도가 아닌 미국정부 주변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다. 스탠더드 앤드 푸어스(S&P)는 이달초 "시간이 걸리겠지만 긴장이 해소될 수 있을 것"이라며 한국의 국가신용등급과 전망을 각각 현재의 'A-', '안정적'으로 유지하면서도 "미국이 북한에 대해 강경입장을 취해 북한이 도발적 행위를 증가시킬 경우" 신용등급을 조정할 수 있다는 중간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정부 관계자는 "절대적 평가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위험도나 금융시장 안정도 등에 대한 평가에 주관이 들어갈 수밖에 없다"며 "오히려 막대한 금액을 한국에 투자한 금융사들이 있는 월가는 전면충돌 위험성을 높게 보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있다. ◆ 신용등급 조정 '긴박' 신용평가사중 한국에 가장 부정적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 무디스가 이미 지난달 길어도 6개월내 신용등급을 낮출 수 있는 '부정적' 등급전망을 내놓은 상태인데다 내달중 한국방문과 등급조정을 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고 등급전망이 아닌 신용등급 자체를 낮추게 되면 타 평가사들에도 부정적 영향이 예상된다. 외국인들이 주식시장에서 순매도행진을 지속하고 있는데다 1천200억달러가 넘는 세계 4위권의 외환보유고와 500억달러가 넘는 순대외채권을 보유한 국가에 어울리지 않게 연일 원-달러환율이 급등조짐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정부는 통상 국가신용등급이 한 등급 움직일 때마다 5억달러의 자금이 움직이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다. 따라서 무디스의 신용등급하량이 기정사실화되면 이 만큼의 해외투자자본이 날아가는 셈이지만 악영향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신용평가사의 등급하향은 주요 투자은행과 펀드들의 자산구성에서 일제히 한국물 비중이 대거 축소되기 때문에 국내 증시에서 외국인 투매, 그리고 이 자금을 빼내기 위한 서울외환시장의 환율급등으로 이어지는 것이 불가피하다. 또 국가신용등급이 하향되면 산업은행 등 국책금융기관은 물론, 주요 민간금융기관과 기업의 신용등급이 일제히 하락하기 때문에 당장 민간베이스의 해외차입이 어려워지고 차입이 되더라도 그 위험도를 반영해 더 비싼 금리를 물어야 한다. 삼성경제연구소 최희갑 수석연구원은 "최근 경제 대내외적 상황이 매우 악화돼 신용등급 하향조정의 위험성이 내포돼 있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북핵문제에 대한 부정적 분석이 힘을 얻으면서 외국인의 한국경제를 바라보는 시각도 낙관론과 비관론이 마구 혼재된 상태인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대우증권 홍성국 투자분석부장도 "무디스의 신용등급 하향조정 가능성은 주식시장에서 이미 감지된 것으로 보인다"며 다만 신용등급 하향조정에는 경제펀더멘털보다 북핵문제라는 국가리스크가 주요 변수로 작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가계부실 등 국내여건도 악화 수출호조에도 불구하고 소비심리가 움츠러들고 기업들의 투자도 부진해 국내 경기는 전반적으로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기업은 대내외의 불확실성과 새정부정책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투자를 기피하고 있다. 1월 제조업생산 증가율이 전년동월대비 3%에 그치는 등 증가세가 크게 둔화됐고 1월 서비스업은 18개월만에 최저인 3.7%성장에 머물렀다. 또 가계는 정부의 가계대출 억제 등으로 소비를 극도로 줄이고 있다. 특히 가계대출 증가문제는 다소 증가세가 둔화되고 있지만 카드연체율이 높아지고 신용불량자수가 계속 증가하고 있어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다. ◆환율 불안.외화차입 비상 이달 들어 급등세였던 환율은 지난 11일 정부 개입으로 일단 하락세로 돌아섰으나 SK글로벌 문제가 불거지면서 다시 상승세로 돌아서 12일 오전 11시30분 현재 6.7원 오른 1천236.6원을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환율이 불안한 것은 미-이라크전쟁 불안감에 북핵문제가 겹치고 여기에 다시 SK글로벌 분식회계가 터지면서 향후 원화 약세가 지속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기 때문이다. 환율은 작년말 1천186.2원에서 50원 4.3% 오르고, 원.엔 환율은 100엔당 1천55원으로 작년말(999.83원)에 비해 5.5% 급등했다. 환율이 오르면 수출업체에 유리하게 작용해 경상수지가 개선되는 효과가 있으나 수입물가 상승으로 소비자물가가 흔들리게 된다. 특히 외채가 적지않은 우리나라로서는 원리금 상환이 늘어난다. 원.달러 환율에 비해 원.엔 환율의 상승폭이 커지면서 엔화대출자들이 환차손에 노출됐다. 작년말 현재 우리 기업(대부분이 중소기업)의 엔화대출규모는 70억달러로 엔.원환율 1천원대 이하에서 돈을 빌렸다. 이와 함께 국내 기업이나 금융기관의 외화차입에 비상이 걸렸다. 외화차입의 기준이 되고 있는 외국환평기금채권 금리가 급등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국내 금융기관들은 보유외화가 많아 시급한 자금차입에 쫓기고 있지는 않지만 국민은행 등 현재 외화차입을 추진하고 있는 금융기관들이 차입 가산금리 상승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금융계는 북핵문제 불안감이 여전하고 SK글로벌의 분식회계로 은행들의 신용도가 실추된 상태여서 상황은 더욱 악화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 97년 외환위기 직전과 유사 현재 한국의 경제상황은 여러가지 면에서 97년 외환위기 직전과 비슷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어 `또 다시 경제위기가 오는 게 아니냐'는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외환보유액 규모가 훨씬 많아졌기 때문에 외환위기는 오지 않을 것이라는 '낙관론'도 있다. 외환위기 전인 97년 9월 외환보유액이 220억달러였던 데 비해 1월말 현재 보유액은 1천240억달러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대내외 악재가 겹치고 신용등급마저 추락해 외국인투자자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게 되면 상황은 달라질 가능성이 높다. 이와 관련, 폴 그룬왈드 국제통화기금(IMF) 서울사무소장은 "한국경제에 97년과 같은 위기가 재발할 가능성은 낮지만 최악의 경우 3%대의 성장률을 기록할 수 있다"고 밝혔다. (서울=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