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꾸로 가는 화의제도'' ]

지난해 9월 서울지법 남부지원에 화의를 신청했던 기아자동차는 수출대금
으로 받은 7천3백55만달러를 눈앞에서 날려버렸다.

금융기관이 부실채권을 회수하기 위해 기업의 예.적금과 대출금을 상쇄시킨
탓이다.

이른바 예대상계를 해버린 것이다.

한 푼의 운영자금이 아쉬운 판에 1천억여원을 만져 보지도 못한채 날린
셈이다.

서울지법에 화의를 신청했던 S기업도 은행에 넣어둔 회사돈 40억원을
돌려받지 못했다.

현재 화의절차를 밟고 있는 J사 역시 보험사 예금을 포함해 7백억여원을
상계당했다.

화의성사여부가 "은행의 손"에 달려있는 기업은 항의 한번 제대로 할 수
없다.

결국 기업은 다른은행에 구좌를 개설, 회사자금을 입금을 하거나 임직원
명의의 개인통장에 넣어두는 위법행위까지 저지를 수 밖에 없다.

기업재건을 도와주기 위해 도입한 화의제도가 오히려 재건의 단초를 뽑아
버리는 아이러니로 나타나고 있다.

화의제도의 난맥상은 여러군데서 드러난다.

물품대금이나 공사대금 등에 대한 가압류신청을 막을 길이 없다는게
대표적인 케이스.

이는 보전처분내용에는 가압류결정을 중지시키는 효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 폐해는 이렇게 나타난다.

"유통업체의 경우 물품대금을 가압류해 버리면 회사는 넘어갈 수 밖에 없다.
이 경우 오히려 다수채권자가 손해를 볼 수도 있다"(도건철 변호사)

재판부도 제도의 맹점을 알고 있다.

지난해 12월 대법원의 설문조사에서 상당수의 화의사건 재판부가 보전처분
범위에 담보권자의 채권강제집행 정지도 포함시켜야 한다고 답한게 이를
반증한다.

물론 은행도 할 말은 있다.

은행은 부도부터 막고보자는 식의 화의신청, 채권상환기간 연장과 경영권
유지, 낮은 이자율 적용 등에 불만이 많다.

"현행 화의는 채무자만 신청할 수 있으며 은행은 기업이 제시한 화의조건에
대한 입장표시만 가능하다. 40개에 달하는 거래기업들과 화의조건을 놓고
입씨름을 벌이다 보면 은행 부실화는 더욱 심각해질수 밖에 없다"(H은행
여신부장)는 것이다.

결국 양측은 채권채무를 동결시키는 보전처분에 대해 "정당한 재산권
행사를 가로막는 초헌법적 행위(금융기관)" 라거나 "기업재건을 효과적으로
지원하지 못하는 지극히 불완전한 보호장치(기업)"라는 판이한 해석을 하고
있다.

법무부는 이러한 제도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62년 제정된 후 처음으로
화의법개정안을 지난달 내놓았다.

그 주된 내용은 자산이나 부채규모가 크거나 부실경영으로 재정적 파탄에
직면한 경우 화의신청을 기각토록 하고 채무자가 1년에 2회씩 채무이행
상황을 법원에 보고토록 하는 등 재산운용에 대한 관리감독권을 강화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기업을 정상화시키기 위한 "조장조치"는 빠져 있다는 지적이
많다.

"미국처럼 신청 즉시 채무와 자산이 동결되는 보전처분효과를 부여해야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보전처분과 개시결정으로 절차가 2원화돼 있다. 같은
사안에 대해 심사를 두번 한다"(고동수 산업연구원 박사)

하지만 개정안안에는 이런 내용이 없다.

재건이 전제되는 게 화의제도라면 그에 걸맞는 수단을 만들어 주는 것은
타당하다.

이에따라 "채권자들에게 기업회생후를 만기로 하는 신주인수권부사채나
전환사채를 발행하는 방안도 추진해야 한다"(정진영 변호사)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 특별취재팀=남궁덕 김문권 이심기 김인식 기자 >

(한국경제신문 1998년 2월 6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