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호의 통섭의 경영학] AI 협상 시대, 협상력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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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닷컴 더 라이프이스트
이러한 변화는 협상 학습의 문턱을 획기적으로 낮춘다. 협상은 경험과 정보의 비대칭이 결과를 좌우하는 영역이다. AI는 상황별 시나리오를 제시하고, 가치 창출(value creation)과 가치 주장(value claiming)은 물론, BATNA(Best Alternative to a Negotiated Agreement), 객관적 기준(Standards), 이해관계와 입장의 구분(interests vs. positions), ZOPA(Zone of Possible Agreement) 등과 같은 원칙 기반 협상의 핵심 개념을 구조화해 설명함으로써 학습 격차를 줄여준다.
여기에 MESOs(Multiple Equivalent Simultaneous Offers)를 통한 선택 설계, 이슈 간 교환을 의미하는 로그롤링(logrolling), 그리고 앵커링(anchoring)과 프레이밍(framing) 같은 행동경제학적 편향까지 다룸으로써, 협상을 단순한 대화 기술이 아니라 전략적 의사결정의 영역으로 확장시킨다. 제대로 활용한다면 AI는 개인에게 ‘상시 대기 중인 협상 코치’가 될 수 있다.
이 가능성을 교육 현장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실험한 곳 중 하나가 MIT다. MIT의 다자간 협상 강좌에서는 하버드 협상 프로젝트 강사 사무엘 디너와 MIT 교수 로렌스 서스킨드가 컴퓨터 과학자들과 협력해 교육용 AI 협상 봇을 개발했다. 이 프로젝트의 목표는 학생들에게 하나의 정답이나 모범 답안을 주입하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각 학생이 스스로의 경험과 판단을 통해 ‘자신만의 협상 이론’을 구축하도록 돕는 데 초점이 맞춰졌다.
MIT 협상 수업에서 활용되는 AI 협상 봇은 단일한 역할을 수행하지 않는다. 협상 이전의 준비 단계, 실제 협상 진행 단계, 그리고 협상 이후의 사후 분석 단계에 각각 특화된 봇이 설계되었다. 이를 통해 학생들은 협상을 하나의 이벤트가 아니라 준비–상호작용–학습으로 이어지는 연속적인 과정으로 인식하게 된다.
특히 주목할 만한 장치는 이른바 ‘백테이블(backtable) 봇’이다. 실제 협상에서는 공식 테이블에 앉아 있는 당사자보다 그 뒤에서 의견을 형성하고 압력을 행사하는 동료, 상사, 유권자, 이해집단이 결과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교실 환경에서 이러한 막후 이해관계자들을 재현하는 것은 쉽지 않다. MIT 교육팀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대 진영의 백테이블 구성원 역할을 수행하도록 특별히 훈련된 AI 봇을 도입했다.
예를 들어 환경 단체 대표 역할을 맡은 학생은 지역 시장의 비서실장 역할을 하는 백테이블 봇과 대화를 나누며, 시장이 어떤 정치적 부담을 느끼는지, 어떤 논리와 조건이 설득력을 가질 수 있는지를 탐색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협상은 더 이상 ‘상대방을 설득하는 기술’이 아니라 복잡한 이해관계의 지형을 읽고 설계하는 문제로 확장된다.
MIT 연구팀은 <협상 저널(Negotiation Journal)>에 게재한 논문에서 “상대방 측의 비공개 이해관계자들과 접촉함으로써, 협상가는 보호된 환경에서 기존의 틀을 깨는 절충안과 창의적인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다”고 밝혔다. 실제로 이러한 AI 봇을 활용한 시뮬레이션에 참여한 학생 중 82%는 협상 준비가 더 철저해졌다고 응답했으며, 77%는 상대방의 이해관계를 이해하는 데 실질적인 도움이 되었다고 답했다.
특히 백테이블 봇과의 상호작용은 학생들의 사고방식에 변화를 가져왔다. 교수진에 따르면 다수의 학생들이 봇과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협상 전략과 이론적 접근을 재검토하고, 보다 정교한 실무 관점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AI가 단순히 기술적 조언을 제공하는 도구를 넘어, 사고를 자극하고 성찰을 유도하는 학습 파트너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분명한 한계도 존재한다. AI의 답변은 언제나 신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챗봇은 때때로 사실과 다른 정보를 만들어내는 ‘환각(hallucination)’에 빠지며, 불완전하거나 오래된 데이터, 혹은 편향된 관점에 기반해 조언을 제시할 수 있다. 무엇보다 협상 상황에서 AI는 지나치게 ‘만만한 상대’가 되기 쉽다. 갈등을 회피하고, 빠른 합의를 선호하며, 실제 협상에서 요구되는 긴장과 압박, 그리고 이해관계 충돌의 거친 현실을 충분히 재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이 지점에서 중요한 구분이 필요하다. 문제는 AI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 설계되고 어떤 용도로 사용되느냐다. 범용 AI를 즉석 조언자로 사용하는 것은 협상을 단순화할 위험이 있지만, 학습 목적에 맞게 설계된 AI는 인간의 협상 역량을 깊이 있게 단련시키는 도구가 될 수 있다.
결국 협상에서 AI의 역할은 ‘대신 결정해주는 존재’가 아니라 사고를 훈련시키는 거울이자 스파링 파트너다. 협상의 본질은 여전히 인간의 판단, 책임, 그리고 관계 관리에 있다. AI는 그 옆에서 질문을 정교하게 만들고, 보이지 않던 이해관계를 드러내며, 선택의 결과를 점검하게 돕는 조력자일 뿐이다.
<한경닷컴 The Lifeist> 정인호 GGL리더십그룹 대표/협상전문가(ijeong1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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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 문의 : thepe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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