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의 작곡가’란 별명으로 불리는 러시아의 작곡가 ‘알렉산더 보로딘 (Alexander Porfiryevich Borodin, 1833-1887)’은 러시아의 후기 낭만 작곡가이자 화학자였습니다. 조지아의 귀족과 러시아 여인의 사생아로 태어난 보로딘은 어려서부터 명석함과 음악성을 모두 지닌 인물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는 과학 분야에 큰 흥미를 보여 상트페테르부르크 의대에 들어가 우수한 성적을 거둔 것은 물론 독일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박사 후 연구원으로 3년간 일했으며, 1862년부터 자신의 모교에서 교수로 재직했습니다.
일리야 레핀이 그린 보로딘의 초상 /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보로딘은 우리에게는 숙취를 부르는 요소로 알려진 ‘아세트알데히드’를 발견 및 연구하였습니다. 또 그는 유기화학 분야에서 매우 흔하게 발생하는 현상인 ‘친핵성 치환’을 최초로 입증한 화학자 중 한 명입니다. 러시아의 교육을 장려하는 데 앞장섰던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여성을 위한 의학부를 설립하도록 주도하는 등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던 성공한 화학자였죠. 그럼에도 그는 어린 시절 피아노, 플루트와 첼로 등을 배웠던 것을 게을리하지 않고 취미로 이어갔으며 <헬렌 폴카 (Helene Polka), 1943>와 같은 작품들을 작곡하기도 했습니다.
이탈리아 피사의 대학교에서 연구를 이어가던 보로딘이 다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 1862년, 29세의 그는 한 명의 작곡가와 운명적인 만남을 갖게 되었습니다. 바로 지휘자 겸 피아니스트였던 작곡가 ‘밀리 발라키레프 (Mily Alexeyevich Balakirev, 1837-1910)’였습니다. 다방면으로 지식이 풍부하고 명철하였던 발라키레프는 예술가들은 물론 지식인들과도 폭넓은 관계를 유지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발라키레프에게는 제자들이 다수 있었는데, 그중에는 1856년 보로딘과의 만남으로 인생이 뒤바뀐 작곡가인 ‘무소르그스키 (Modest Petrovich Mussorgsky, 1839-1881)’도 있었습니다.
당시 17세의 근위병 무소르그스키는 당시 상트페테르부르크 군 병원에서 상주 외과의로 복무 중이던 5살 연상인 보로딘이 피아노를 연주하는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무소르그스키는 발라키레프에게 작곡을 배우고 작곡가의 길을 가기 위하여 제대하였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1862년 보로딘이 발라키레프의 제자가 되며 그들은 동료가 되었습니다. 발라키레프가 러시아 민족악파 음악가들의 모임인 ‘러시아 5인조 (힘센 무리들/Могучая кучка)’를 조직하였을 때 보로딘은 당연히 무소르그스키와 함께 림스키 코르사코프와 세자르 쿠이가 포함된 이 작곡가 그룹에 들어가게 되었죠. 특히 군사 전문 학자이자 장군이었던 세자르 쿠이, 해군 장교였으며 작곡가였던 림스키 코르사코프 역시 발라키레프의 제자였었기 때문에 같은 처지의 그들은 결속력이 매우 두터웠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게 쿠이, 무소르그스키, 림스키 코르사코프, 보로딘의 공동 작품인 4막의 발레-오페라 <믈라다 (Mlada)>도 탄생할 수 있게 되었죠.
미하일 로프가 그린 러시아 5인조를 포함한 발라키레프의 모임 /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화학 연구에 파묻혀 지내야 했던 보로딘은 이렇게 작곡가들과의 교류와 창작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휴일에는 작곡만을 몰두하여 ‘일요일의 작곡가’란 별명을 얻게 되었는데요. 그는 3개의 교향곡, 교향시 <중앙아시아의 대초원에서>는 물론 2개의 현악 사중주, 현악 사중주를 위한 <스케르초>, 2개의 현악 삼중주, 2개의 피아노 트리오, 첼로 소나타, 현악 육중주, 피아노 오중주 등 자신이 심취하였던 실내악 작품을 다수 작곡하였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쪼개어 작곡한 다수의 작품 중 플루트 협주곡과 다수의 피아노 독주곡, 그리고 그의 첫 오페라 <차르의 신부>의 스케치 등은 모두 분실되어 안타까움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1869년, 발라키레프를 비롯한 러시아 5인조의 친구이자 그들을 널리 알린 예술 평론가였던 ‘블라디미르 스타소프 (Vladimir Vasil’evich Stasov, 1824-1906)’는 12세기 중세 러시아의 서사시인 <이고리 원정기 (The Tale of Igor’s Campaign)>를 토대로 오페라를 작곡할 것을 보로딘에게 권합니다. 12세기 동슬라브족의 공국 연합인 ‘키예프 루스’의 대공 스바토슬라비치가 유목민족인 ‘폴로베츠인’들의 빈번한 침공에 그들을 정벌하기 위해 출정하지만 크게 패하여 아들과 함께 포로가 되지만 무사히 탈출하는 이야기가 바로 <이고리 원정기>인데요. 이 이야기에 매료된 보로딘은 실제로 대본을 직접 쓰며 자신의 첫 오페라의 완성에 심혈을 기울이게 됩니다. 안타깝게도 콜레라를 비롯한 심장 문제, 과로 등으로 인하여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며 러시아의 역사를 다룬 보로딘의 유작인 이 4막의 오페라 <이고르 왕자 (Prince Igor/Knyaz Igor)>는 완성하지 못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질 위험에 처하게 되었지만요.
[좌] 1909년 마린스키 극장에서 올려진 오페라에서 이고르 왕자의 의상 디자인 [우] 1930년 이반 필리빈이 그린 오페라 <이고르 왕자> 중 폴로베츠 부족의 장면 /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보로딘의 염원이 주변에 그를 아꼈던 음악가들의 마음을 흔들었던 것일까요? 러시아 5인조의 일원인 ‘림스키 코르사코프 (Nikolai Andreyevich Rimsky-Korsakov, 1844-1908)’와 그의 제자였던 ‘글라주노프 (Alexander Konstantinovich Glazunov, 1865-1936)’가 보로딘의 ‘백조의 노래’를 함께 완성하게 됩니다. 그렇게 오페라 <이고르 왕자>는 1890년, 보로딘이 세상을 떠나고 3년 뒤에 초연이 올려집니다. 초연 이후에는 대부분 글라주노프가 재창조하고 작곡한 3막은 삭제하고 연주하거나 1막과 2막의 스토리 등이 겹쳐 그 장면들을 섞어서 연주하는 등의 변화를 줘 오페라를 연주하고 있습니다.
노브고로도의 공작 ‘이고르 왕자’는 폴로베츠 부족과의 전투에서 처참하게 패하고 아들 ‘블라디미르’와 함께 포로로 잡히지만, 천신만고 끝에 탈출하여 군중들의 환호 속에 귀환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오페라의 매우 흥미로운 점은 블라디미르가 적군인 폴로베츠 부족의 지도자인 ‘콘차크 칸’의 딸 ‘손챠코브나’와 사랑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탈출을 재촉하는 아버지와 자신을 떠나지 않게 하려는 사랑하는 여인 속에서 결국 남기로 결정하는 블라디미르의 모습에 감동한 콘차크는 이들의 결혼을 허락하는 것은 물론, 이고르 왕자가 탈출할 수 있도록 쫓는 것을 포기하고 그 대신 남은 경비병들은 사살하도록 명합니다.
평생 성실하게 일하며 자신의 대표작이자 유작인 ‘백조의 노래’, <이고르 왕자>를 남긴 보로딘, 안타깝게 완성은 하지 못하였으나 그의 벗들의 노력으로 완성된 이 오페라는 지금도 오페라는 물론, 2막에 등장하는 ‘플로베츠인의 춤’이 단독으로 오케스트라 공연에서 레퍼토리로 연주되며 많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