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산한 찬 바람이 부는 가을이 시작되면 미뤄왔던 옷장 정리가 시작된다. 몇 해 전, 좋아하는 책의 주인공으로 꾸미고 가야 한다며 아이가 입고 갔던 앨리스 옷을 발견했다. 당시에도 앨리스가 아닌 다른 주인공을 찾아보자며 괜한 심술을 부렸던 터라 그 옷을 발견했을 시 달갑지만은 않았다. 그 옷을 구매할 당시 여러 구매 사이트에 선정적인 모습으로 앨리스를 표현한 소품, 의상들을 보며 아이에게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며 옥신각신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좌] 『First edition cover (1865)』 /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우]   『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 ⓒAnthony Browne / 사진출처. 예스24
[좌] 『First edition cover (1865)』 /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우] 『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 ⓒAnthony Browne / 사진출처. 예스24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초판이 1865년에 발간되었으니, 올해로 160주년이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읽고 또 읽었던 이 동화책의 주인공 앨리스와 하이엔드격의 등장인물을 다시 생각해 본다.

월트디즈니 애니메이션에 나오는 아름답고 순진하지만, 모험심이 강한 모습의 앨리스는 진짜 앨리스인가? ‘Drink me!’라고 적힌 물약을 의심 없이 들이켠 그는 경솔한 사람이었나? 아무 의심 없이 사랑했던 동화에, 늦은 질문을 건넨다.

앨리스는 어떤 세계관을 만들었나

낯선 이, 그것도 사람이 아닌 흰토끼를 쫓아 토끼 굴로 한없이 떨어진 앨리스는 경험하지 못했던 세상과 마주한다. 앨리스는 매일 1분, 1초마다 현실의 순간을 벗어나고 싶어 했던 사람이었을까? 이곳은 내가 가진 영혼과 꿈이 향해야 할 곳 아니라고 느낀 지루한 긴 시간 중에, 아주 느슨한 틈을 이용해 그에게 새로운 탈출구가 만들어진다. 앨리스는 토끼 굴로 탈출해 그의 세계관을 만든다. 하지만, 그 세계에서도 자아 인식의 어려움으로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인다. 수동적인 삶을 살아왔던 그대로의 모습이다. 하지만 앨리스는 반전의 세계관을 만들기 시작한다. 무시와 경멸도 당하고 세상의 억지도 겪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거침없이 말할 수 있게 되며, 결단력을 지닌 대범한 모습으로 변화한다. 현실 세계에서 내보이지 못했던 나의 모습을 가감 없이 드러낼 수 있는 이상한 세계에서 그는 진정한 여왕이 된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토끼 / 사진출처. 비룡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토끼 / 사진출처. 비룡소
공포의 물약은 앨리스의 자아를 몇 센티까지 작게 만들었을까

원작에서 물약은 앨리스를 알게 해 주는 매개체이다. 의외로 앨리스는 물약을 마시기 전 ‘독성’이라고 적혀있진 않은지 살펴보기도 하고, 경솔한 행동을 했다가는 사나운 맹수와 기분 나쁜 괴물들에게 잡아먹힌다는 책의 내용을 떠올리기도 한다. 꽤 신중한 모습을 보이는가 싶더니 별안간 단숨에 마셔버린다. 게다가 물약의 맛도 ‘버찌 파이와 커스터드, 파인애플과 구운 칠면조 고기와 토피 사탕에 뜨거운 버터 식빵’이 섞여 있는 맛이라고 표현한다. 물약을 들이켠 본인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시작하는 증거이다. 그 글귀에서 독자는 앨리스가 느낀 그 물약의 맛이 매우 궁금해지는 미련한 호기심이 생김과 동시에 인간은 얼마나 유혹에 취약한 나약한 동물인가를 느낀다.

물약은 앨리스의 불안정한 자아를 대변한다. 턱이 발에 닿을 정도로 작아졌다 커졌다 계속 바뀌는 자기 모습에 힘들어하다가 나중에는 적정 8센티미터부터 60센티미터까지 본인의 모습을 조절할 수 있게 된다. 토끼 굴의 세계로 탈출했지만 달라지지 않는 자기 모습을 다른 물리적인 힘을 이용해 바꾸려고 노력한다.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물약과 버섯의 치트키는 비난받을 수 있지만, 앨리스에게 다가온 운명적 도구를 잘 사용했다는 점에서 칭찬할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앨리스 / 사진출처. British Library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앨리스 / 사진출처. British Library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동화 속에서 인공지능 시대에 가장 적응을 잘할 등장인물은 누구인가
단연코 체셔 고양이라고 말하고 싶다. 공작부인 집에 들렀다가 학대당하고 있는 아기를 데리고 뛰쳐나온 앨리스는 길을 잃는다. 아기는 새끼 돼지로 변해가고, 그 흔들리는 세계관의 끝에서 혼란을 느끼고 있을 때, 바로 체셔 고양이가 나타난다.

앨리스에게 질문을 던지고, 앨리스의 모호한 답변에 더 모호하게 들리지만, 정확한 답변을 제시한다. 여러 어려운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웃는 얼굴로 관찰한다. 언제나 상황의 맥락을 잘 읽고 존재와 부재를 오가는 체셔 고양이야말로 초 단위로 변해가는 빠른 세상에 필요한 인재라고 할 수 있다. 체셔 고양이는 원작자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이 태어난 영국 체셔 지방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영국에는 ‘체셔 고양이처럼 웃는다.’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어떤 상황에서도 웃음을 남기고 사라지는 그 존재는 편협한 세상을 향해 비웃음을 던지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시대를 가장 유연하게 살아갈 존재이다.
『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 ⓒAnthony Browne / 사진. © 박효진
『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 ⓒAnthony Browne / 사진. © 박효진
모자 장수는 왜 미쳤을까

원작에는 ‘Mad Hatter’라고 적혀있는 모자 장수는 왜 항상 광기 어린, 정신없고, 기괴한 사람으로 표현될까? 앨리스와의 상관관계를 따져보았을 때 이상한 나라에서 미친 사람이 등장할 수는 있겠지만, ‘왜 모자 장수였는가’가 의문이었다. 의외로 해답은 미친 사람과 모자 장수의 상관관계에서 찾을 수 있었다.

18~19세기 유럽, 미국에서 펠트(felt) 모자를 만들 때 토끼나 비버 등의 털을 이용했는데, 이 과정에서 카로팅(car-roting)이라고 불리는 처리 과정에서 질산수은 용액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이후 펠트를 가열·건조하는 과정에서 수은이 증발하거나 수은화합물이 공기 중에 노출되었고, 작업장 환기가 잘 안되는 경우가 많아서 일하는 사람들이 수은 증기나 입자에 지속해서 노출되었다. 그런 환경에서 수은에 중독된 작업자들은 불안이나 초조함, 짜증, 과민성 우울 등의 증상을 자주 보였다고 한다. ‘모자 장수처럼 미친(Mad as a hatter)’이라는 숙어까지 등장하며 그들은 광기 어린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좌] 펠트 모자 가공 과정 / 사진출처. amusingplanet  [우] 펠트 모자 /사진출처. leeds.gov.UK
[좌] 펠트 모자 가공 과정 / 사진출처. amusingplanet [우] 펠트 모자 /사진출처. leeds.gov.UK
원작에서는 멋진 턱시도를 입고 다과회에 앉아 차를 즐기는 모습이었지만, 그의 앨리스를 대하는 태도와 기괴한 행동들은 상식의 경계선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든다. 카리스마 넘치는 독보적인 존재임과 동시에 이면에 숨겨진 슬픈 진실을 대변하는 인물이다. 책의 후반부에 파이를 훔친 도둑을 잡는 재판에서 모자 장수는 그의 체면마저도 상실하고 만다. 말끝마다 ‘머리를 치라’는 왕 앞에서 그는 허둥거리며 신발도 신고 나오지 못하는 어리숙한 모습을 보인다. 권력과 힘 앞에서 그의 나약함은 한없이 노출되었다.
[좌측부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모자 장수 / 사진출처. 비룡소 / 『Alice nel paese delle meraviglie』ⓒFrancesca Del’orto / 사진출처. amazon / 영화 『Alice in Wonderland』ⓒDisney / 사진출처. Google
[좌측부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모자 장수 / 사진출처. 비룡소 / 『Alice nel paese delle meraviglie』ⓒFrancesca Del’orto / 사진출처. amazon / 영화 『Alice in Wonderland』ⓒDisney / 사진출처. Google
동화를 다시 읽으며 깨닫는다. 어쩌면 경솔했던 것은 물약을 마신 앨리스가 아니라,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을 의심 없이 보이는 대로만 받아들였던 우리 자신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상상 속에서 시작된 이상한 나라는 이제 어른의 세계로 옮겨와 또 다른 이상한 나라의 토끼 굴로 이어진다.

박효진 길리북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