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떼 칼럼] "아빠, 어서 와. 고생 많았어"
저녁 약속이 있던 어느 날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 현관에 들어섰습니다. 아이들이 잠들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아니었습니다. 마침 초여름에 어울리는 보슬비가 내렸는데 아이들은 잠들기 직전 마지막 힘을 모아 빗소리를 듣고 있었습니다. 나뭇잎에 닿는 빗방울 소리가 꽤나 매력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초등학생 아들이 한마디 건넵니다. “아빠, 어서 와. 고생 많았어(정말 이렇게 말하는 아들입니다). 여기 와서 빗소리 좀 들어봐. 굉장해.”

아마도 책이나 영화에서만 묘사됐던 그 순간을 공유하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제가 한술 더 떠서 말했습니다. “아, 좋구나. 그럼 내일 아침에 아빠가 이 빗소리를 상상하며 작곡한 음악을 들려줄게. 바로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이란다.”

여기까지만 이야기하고 쑥스러움에 씻으러 가는 제게 다시 말을 잇습니다. “아빠, 아주 좋은 생각이네. 우리 내일 아침에 그 음악을 들으며 일어나자. 우리 그 음악을 ‘알람 소리’라고 하자.” 빗소리는 다음날 아침까지 이어졌고, 아이들은 쇼팽의 음악을 꼭 기억하겠다며 미소 지었습니다.

하루는 영어 단어를 열심히 공부하던 초등학생 딸이 묻습니다. “아빠, 나 ‘올(all)’을 사용해서 문장을 하나 만들 거야. 내가 만들고 싶은 문장은 ‘모든 사람은 각자의 인생이 있다’야. ‘올 피플(all people)’이라고 하면 돼?”

그렇게 탄생한 문장은 ‘모든 사람에게는 저마다의 인생이 있다(Everyone has their own life)’입니다. 기초 문법책에 나올 법한 문장을 왜 떠올렸는지는 물어보지 않았습니다. 속으로 ‘우리 애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구나’ 생각하며 그저 동의했을 따름입니다. 그 덕분인지 어른인 제가 때때로 타인과 비교하며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거나 허무주의에 빠지지는 않았는지 반성하게 됐습니다.

마침 당시에 과학철학자 헬레나 크로닌이 쓴 <개미와 공작>을 비롯해 다윈주의에 기초한 진화학 서적을 열심히 읽고 있었으니 공감의 뜻을 나타내기도 수월했습니다. 딸의 영작문에 화답하듯 이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다양성이지. 종의 다양성뿐만 아니라 삶의 다양성. 친구와 비교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헛된 일이지.”

어떤 도시를 여행하던 날도 있었습니다. 이야기의 주제가 그리스·로마 신화로부터 문명의 발생, 역사로 이어집니다. 큰아이가 “아, 그러니까 이 도시는 청동기 시대의 모습을 간직했고. 그다음은 여기는 철기시대 유적이 있고, 그다음은…. 아빠, 철기시대 다음은 무슨 시대지?” 곰곰이 생각하려던 찰나 둘째 아이가 대답합니다. “뭐긴 뭐야 먹기시대지. 아, 배고파.”

겉모습만 어른으로 바뀌었을 뿐, 스스로는 아직도 어른이 되려면 한참 멀었다고 생각할 때가 많습니다. 단지 아이들 앞에서만이라도 어른 흉내를 낸다고 할까요? 그런데 오히려 아이들과의 대화 속에서 감동하거나 각성하는 순간이 많습니다. 어쩌면 먼 훗날 지금보다 한층 깊은 깨달음을 얻어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을까 상상해봅니다.

“내가 어렸을 때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고린도전서 13장 11절을 인용한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1997)>의 마지막 대사를 재인용)

물론 (어지간한 어른보다 훌륭한) 어린아이였을 때의 말과 생각을 영원히 잊지 못하겠죠. 그게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열심히 읽고 마음을 다듬어 조금이라도 더 나은 어른으로 성장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