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주의는 합법과 민주주의의 가면을 쓰고 온다 [서평]
2021년 1월, 미국 민주주의 역사에서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대통령 재선에 실패한 도널드 트럼프 지지자들이 선거 결과에 불복하며 국회의사당에 난입했다. 트럼프의 독려와 함께 시위대는 의사당 유리창과 문을 부수고 들어가 상원의장 의장석까지 점거했다. 자국민에 의해 의사당이 피해를 입은 건 미국 역사상 최초다.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는 이 같은 사태를 목격하고 충격에 빠진 미국 정치학자들의 고민이 담긴 결과물이다. 저자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하버드대 교수는 전작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2018)를 통해 민주주의의 붕괴를 경고, 전 세계적 베스트셀러에 오른 바 있다. 저자들은 트럼프와 그의 지지자는 물론이고 공화당 주류 정치인까지 선거에 불복하는 모습을 보고 "미국의 민주주의가 급격히 후퇴했다"고 진단했다.

저자들은 트럼프와 같은 극단주의자가 세력을 얻을 수 있게 된 건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들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저자들이 정의하는 '충직한 민주주의자'는 △선거 결과에 승복할 줄 알고 △권력을 쟁취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하지 않으며 △같은 진영이라 해도 극단주의 세력과 동맹을 맺지 않는다. 그러나 주류 정치계에 속한 표면적으로 충직한 민주주의자는 극단주의 세력을 묵인하거나 은밀하게 지원함으로써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파괴한다.
극단주의는 합법과 민주주의의 가면을 쓰고 온다 [서평]
극단주의자의 또 다른 강력한 무기는 시대정신을 반영하지 못하는 낡은 헌법이다. 이른바 '건국의 아버지들'이 정교하게 설계한 것으로 알려진 미국 헌법은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여겨지지만, 그 기원을 살펴보면 현대 민주주의에 적합하지 않은 내용이 많다. 인구수에 비례하지 않은 의석수와 간접선거나 다름없는 선거인단 제도가 대표적이다.

지금의 의회 구성과 선거인단 제도는 과거 노예 소유주들을 설득하기 위한 타협의 산물이란 설명이다. 당시 노예제가 있는 주들은 투표를 할 수 없는 노예들까지 투표 인구로 인정받아 더 많은 의석수를 확보했다. 여기에 의석수에 비례한 선거인단 제도로 대통령을 선출하게 되면서 대선에 더 많은 영향력을 미치게 됐다. 그 결과 남부와 백인의 표만으로 다수 의석과 대통령 자리를 차지하는 게 가능해졌다. 트럼프와 공화당이 여성과 유색인종에 대한 혐오를 남발하고도 권력을 쟁취할 수 있었던 이유다.

극단적인 소수가 득세한 결과 변화를 향한 다수의 의지가 묵살되는 일이 연달아 발생했다. 트럼프가 대통령 시절 임명한 대법관들로 구성된 대법원은 헌법에 보장된 임신중단권을 폐기했다. 실제로는 전체 미국인 중 55%가 낙태 합법화에 찬성하고, 반대 목소리는 39%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필리버스터 역시 원래 국회에서 다수파의 독주를 막기 위해 소수의 의원들이 의사 진행을 지연시키는 방법이지만, 요즘은 극단적 소수파가 악용하는 사례가 늘고 있단 게 저자들의 우려다. 미국 상원에선 투표권 확대나 총기 규제 등을 위한 법안이 과반의 표를 얻었는데도 소수 의원들의 필리버스터로 인해 입법이 가로막힌 바 있다.

물론 민주주의에서 다수의 힘을 제한하기 위한 장치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적은 표를 얻은 이가 많은 표를 얻은 이 대신 공직에 오르고, 의회 다수가 결정한 법안이 소수의 의원에게 가로막히는 등 소수에 의해 끌려다니는 민주주의 역시 제대로 된 민주주의라고 하기 어렵다. 저자들은 소수에 대한 보호와, 특권을 가진 소수에게 부당한 이익을 제공하는 제도를 엄연히 구분해 비판적 시선으로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한다.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