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란이 끊이지 않는 공정거래위원회의 대기업집단 지정 현황이 어제 공개됐다. 올해 자산 총액 5조원 이상으로 공시 대상에 지정된 기업집단은 88곳으로 지난해보다 6곳 늘었다. 이들 집단에 소속된 회사는 작년보다 242개 늘어난 3318개다. 공시 대상 기업집단으로 분류되면 기업집단 현황, 대규모 내부 거래, 비상장회사의 중요사항, 주식 소유 현황 등을 공시해야 한다. 총수 일가 일감몰아주기 규제도 받는다. 웬만한 대기업이라면 이 같은 규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여기에 상호출자·순환출자·채무보증 금지, 금융·보험사 의결권 제한 등의 규제가 더해지는 상호출자제한기업집단으로 48곳이 지정됐다. 이 집단의 지정 기준이 지난해까지 자산 10조원 이상에서 올해부터 명목 국내총생산(GDP)의 0.5% 이상으로 바뀌었지만 규제 대상은 지난해보다 줄지 않고 그대로다.

대기업집단 지정제도는 경제력 집중 완화를 명분으로 1987년 도입됐다. 도입 당시부터 과도한 규제라는 비판이 있었지만 ‘재벌’에 대한 특혜와 지원, 정경유착 등 부작용이 있었던 만큼 어느 정도 역할을 했다는 평가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수명을 다한 규제라는 지적이 훨씬 우세하다. 우선 1990년대 이후 한국이 개방경제로 탈바꿈하면서 다수 대기업은 활동무대가 글로벌 시장으로 바뀌었다.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SK하이닉스, LG전자 등의 해외 매출은 국내 매출과 비견하기 힘들 정도로 크다. 대기업의 국내 사업 확장을 억제하기 위한 제도를 굳이 둘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대기업의 경제력 집중 역시 다른 나라에 비해 과도한 수준이 아니다. 한국경제인협회 조사에 따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비교 대상 19개국 가운데 100대 기업의 자산 집중도나 매출 집중도는 한국이 15위 수준이다. 외국에는 없는 대기업집단 지정 제도를 더 이상 유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사라져야 할 제도가 버젓이 살아있다 보니 김범수 쿠팡 의장을 동일인(총수)으로 지정해야 하는지 등 다른 문제가 생겨나고 있다. 공정위의 본업은 독과점 감시와 경쟁 촉진이다. 미국 경쟁당국은 애플,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등이 거대 기업이라는 이유로 규제를 가하지는 않는다. ‘공정위가 자기 일감 때문에 규제를 놔두는 게 아니냐’는 의혹에서 벗어나려면 하루빨리 폐지하는 게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