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여행자의 필요' 스틸. /전원사
영화 '여행자의 필요' 스틸. /전원사
이리스(이자벨 위페르)는 프랑스에서 온 여행자다. 사실 정확히 어디에서 왔는지는 알 수 없다.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도 모른다. 이곳에 왜 왔는지도, 언제 떠날 것인지도 마찬가지다. 애당초 여행을 하고 있기나 한 걸까.

하나 분명한 게 있다면 그가 ‘이방인’이라는 것이다. 생김새뿐 아니라 사고방식까지 쉽사리 동질감을 느끼기 어렵다. 이 이방인은 두 명의 한국인 여성에게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돈을 번다. 정확히 말하면 프랑스어 교습을 명목으로 자기만의 색깔이 드러나는 삶을 찾아내는 방법을 가르친다. 세상이 수많은 언어로 이뤄져 있듯 남의 시선에 의지하지 않는 자기만의 언어를 찾으라는 권유다. 이렇게 보면 그리스 신화에서 일곱 빛깔 무지개를 밟고 인간세계로 내려오는 신들의 전령 이리스란 이름은 찰떡같이 어울린다.
영화 '여행자의 필요' 스틸. /전원사
영화 '여행자의 필요' 스틸. /전원사
지난달 24일 개봉한 영화 ‘여행자의 필요’는 홍상수 감독의 31번째 장편 신작이다. 알쏭달쏭하면서도 어렴풋하게 유머러스한, 홍상수 맛이 여전히 살아있다. 지난 2월 ‘제74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홍상수에게 다섯 번째 은곰상을 안길 만큼, 해외에서 먼저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무엇보다 ‘다른 나라에서’(2012), ‘클레어의 카메라’(2017)에 이어 프랑스 국민배우 이자벨 위페르(71)와 동행한 세 번째 작품으로, 깊은 사유가 돋보이는 위페르의 매력이 가장 돋보인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리스는 끊임없이 관찰하고 대화한다. 이런 그의 모습은 프랑스어 교습에서 잘 나타난다. 교과서에 나오는 단어를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학생의 속마음을 묻고 이를 종이에 적어 외우라고 건넨다. 마음이 열려야 다른 언어가 들어온다는 그만의 교수법이란다. 첫 번째 학생인 젊은 여성인 이송(김승윤)이 피아노를 치자 이리스는 집요할 정도로 속마음을 캔다. “어땠어?”, “뭘 느꼈어?”란 그의 물음에 “자랑스러웠다”던 이송은 이내 난처한 듯 “사실 조금 짜증 났어”라며 숨겨둔 생각을 털어놓는다.
영화 '여행자의 필요' 스틸. /전원사
영화 '여행자의 필요' 스틸. /전원사
틀에 박힌 사고가 편할수록 이리스는 의심스럽고 불편한 사람이다. 두 번째 학생인 중년 여성 원주(이혜영)와의 만남이 바로 그렇다. 첫 만남에서 원주는 자신의 영어 실력을 과시하듯 이리스를 내려다보며 ‘아이리스’라 부르는 무례를 저지른다. 독특한 학습법에 대해선 어처구니없다는 듯 남편 해순(권해효)에게 “아니 교과서 없이 수업한다잖아”라며 미덥잖아 한다.

그러나 원주 역시 이리스 앞에서 기타를 연주했다가 무엇을 느꼈다는 질문에 “제가 뭘 느꼈을까요”라고 되묻다가 결국 이송과 똑같은 답을 내놓고 무장 해제된다. 피아노가 기타로 바뀌고, 젊은 여성이 중년으로 바뀌었을 뿐 다를 게 없는 상황. 자기 내면을 마주 보는 대화를 나눌 줄은 모른 채 남들이 정한 정답만 따라가려는 모습을 비꼬는 듯하다.
영화 '여행자의 필요' 스틸. /전원사
영화 '여행자의 필요' 스틸. /전원사
‘자기 자신을 아느냐’는 질문은 교습을 마친 후 이리스가 자신과 동거하는 인국(하성국)과 있을때 한층 강렬해진다. 인국은 두 달 전 만난 이리스를 사랑한다. 그는 자신의 엄마인 연희(조윤희)에게 “저 그 사람에 대해 잘 알아요”라고 자신감을 내비치지만, “너 그 여자 모르잖아. 어디서 왔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아는 게 있어?”라고 묻는 말에 우물쭈물하며 뜬구름 잡는 얘기만 늘어놓는다. 외롭게 시(詩)를 쓰는 그가 느낀 사랑은 어쩌면 자유로운 영혼처럼 보이는 프랑스 여행자에 대한 동경에 불과할지 모른다. 인국 역시 자기 자신과 진지한 대화를 나눠보지 못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리스는 이송, 원주, 인국의 정확한 안티테제다. 그는 와인보다 생막걸리를 즐기고, 오랜 세월 챙 넓은 모자를 좋아해 왔다는 걸 타인에게 정확히 설명할 줄 안다. 유머러스하면서도 진지하게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한 호기심을 드러내고 순수하게 배워가는 점에서도 다르다. 이리스를 통해 홍상수는 남의 시선에서 벗어나 ‘나’라는 낯선 세상을 여행하듯 알아보라고 말하려는 것 같다.
영화 '여행자의 필요' 포스터. /전원사
영화 '여행자의 필요' 포스터. /전원사
재밌는 영화는 아니다. 요즘 인기를 끄는 ‘사이다’ 같은 통쾌함도 없다. 하지만 막걸리처럼 달고 쌉싸름한 맛이 영화의 매력이다. 러닝타임 내내 시종일관 막걸리를 마시는 이리스처럼 영화를 본 뒤 ‘나’를 안주 삼아 막걸리 한잔해보는 건 어떨까. 12세 이상 관람가. 러닝타임은 90분.

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