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가 확실해 보이던 때가 있었다. 나아가야 할 길이 명확했고 모두 그 길을 따라 전진했다. 암울한 상황도 있었지만 희망적이었다. 지금보다 나은 미래가 펼쳐질 것이라고 믿었다. 지금은 아니다. 혼란의 시대다. 기술과 세계 정세가 급변한 탓도 있지만 또 한 가지 중요한 요인은 지배적인 정치 질서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뉴딜과 신자유주의>가 말하는 바다. 책을 쓴 게리 거스틀은 미국 역사학자다. 영국 케임브리지대에서 미국사를 가르치고 있다. 그는 1989년 <뉴딜 질서의 흥망 1930-1980>을 동료와 함께 썼다. 이 책을 대대적으로 업데이트한 후속작이 <뉴딜과 신자유주의>다. ‘정치 질서’는 쉽게 말해 정치 이념의 패러다임이다. “2년, 4년, 6년의 여러 선거 주기를 버텨 내면서 중장기적으로 미국 정치를 형성해 왔던 이데올로기, 정책, 유권자들의 배치 상태를 뜻한다”고 설명한다. 지난 100년 동안 미국에선 2개의 정치 질서가 지배했다. 1930년에 발흥해 1970년에 무너진 뉴딜 질서, 1970년대에 일어나 2010년대에 무너진 신자유주의 질서다. 정치 질서의 독특한 점은 진보와 보수가 모두 당대의 정치 질서에 얽매여 정책을 펴게 된다는 점이다. 뉴딜 질서는 민주당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때 힘을 얻기 시작했지만, 공화당인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 때도 지배적인 정치 질서였다. 1953년부터 1960년까지 8년 동안 재임한 아이젠하워는 높은 세율을 유지하고, 케인스주의에 따라 재정 정책을 폈다. 노조에도 우호적이었다. 정부의 중요성을 아는 군인 출신인 까닭도 있지만 공산주의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서였다. 공산주의가 ‘다 같이 잘 살자’는 말로 사람들을 회유하던 때였다. 자본주의의 본산인 미국일지라도 정부가 뒤로 물러선 채 개인이 능력껏 알아서 하라고 할 수는 없었다. 뉴딜 질서의 몰락에는 내부 모순과 한계, 공산주의 쇠퇴가 영향을 미쳤다. 때를 기다리며 이념을 갈고 닦던 보수 이론가들 덕분에 신자유주의는 금방 그 자리를 차지했다.이번에도 좌·우 진영은 신자유주의라는 정치 질서 하에서 움직였다. 신자유주의가 정점을 찍었던 것이 민주당 출신 빌 클린턴 대통령 때였다. 클린턴은 자유무역을 추구했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 서명했고, 세계무역기구(WTO) 출범을 지지했다. 각종 규제를 철폐했다. 합병으로 월스트리트에서 초거대 은행들이 탄생했다. 새로운 금융상품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다음 정권인 공화당 조지 W. 부시 대통령 때 균열이 일어났다. 이라크 전쟁을 벌이며 국력을 낭비했다. 무분별한 규제 완화는 금융위기로 이어졌다. 저자는 ‘기고만장’이란 말로 이 시기를 표현한다. 책은 민주당인 버락 오바마 대통령 정권도 신자유주의 질서 아래 움직였다고 봤다. 도널드 트럼프 당선은 이 질서의 몰락을 뜻하는 사건이었다. 지배적인 정치 질서가 사라진 시대는 정치가 양극단으로 흐른다. 좌·우 진영을 묶어주는 끈이 사라진 탓이다. 각 진영은 자신들이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조차 모를 때가 많다. 정치에 철학이 사라진 것처럼 느껴진다면, 단순히 표를 위해 포퓰리즘을 좇는 것처럼 보인다면 여기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새로운 정치 질서가 수립되기까지 혼란은 계속될 전망이다. 미국 정치사를 다룬 책이지만 한국을 비롯한 각국 정치를 이해하는 데도 실마리를 제공한다. 박정희 대통령도 뉴딜 질서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공산주의와의 체제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복지에 힘쓴 것 등이 그런 예다. 반대로 노무현 대통령은 진보 진영임에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추진했고, 이라크 파병도 했다. 기본적으로 역사책이다. 어려운 정치 이론보다는 실제로 있었던 일을 서술한다. 지난 100년 동안 미국 정치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흥미롭게 읽을 수 있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1924년 6월 3일 프란츠 카프카가 죽었다. 사인은 폐결핵. 향년 40세였다. 그의 부고가 체코 국영 신문 ‘나로드니 리스트’에 실렸다. 내용은 이랬다. “그는 소심하고, 두려움이 많고, 부드럽고, 착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가 쓴 책들은 잔인하고 고통스러웠다. 그는 세상이 무방비 상태의 인간들을 찢고 파괴하는 보이지 않는 악령들도 가득 차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너무나도 형안이 밝고, 너무나 현명했기 때문에 살 수가 없었다. 그는 싸우기에는 너무나 연약한 사람이었다. 고귀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그렇듯이 그는 너무나 약해서, 몰이해와 비정함과 지성적 거짓에 대한 두려움과 싸워 낼 힘이 없었던 것이다.”올해 카프카 타계 100주기를 맞아 관련한 책이 여럿 나오고 있다. <프란츠 카프카: 알려진 혹은 비밀스러운>도 그중 하나다. 프라하, 유대인, 가족, 친구, 연인 등 39개 장면으로 압축해 카프카의 삶을 되돌아본다. 신문에 실린 카프카 부고도 이 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글은 적고 그림은 많아, 누구든 쉽게 읽을 수 있는 카프카 안내서다. <프란츠 카프카의 그림들>은 카프카를 ‘화가’라는 측면에서 접근한다. 카프카는 그림을 곧잘 그렸지만 그런 모습은 잘 부각되지 않았다. 최근까지 세상에 알려진 그의 그림이 40여 점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2019년 이스라엘국립도서관이 11년 간의 법정 다툼 끝에 카프카의 미공개 편지, 원고, 그림 등을 넘겨받았고, 세상에도 공개가 됐다. 카프카 그림 전체를 살려볼 수 있는 게 이 책이 매력이다. <우연한 불행>은 카프카가 쓴 짧은 소설과 글들 55편을 모았다. 독일 피셔 출판사가 기획한 책이다. 이 출판사 편집자 제바스티안 구골츠는 “카프카가 쓴 가장 짧은 글들을 모은 이 책의 비유담들에는 우리가 ‘카프카답다’라고 부를 만큼 그에게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것들이 농축되어 있다”고 했다. 카프카적 전형이란 이렇다. 주인공들은 방향을 잃고 정신적으로 동요한다. 외부 세계는 마치 안갯속에 잠긴 듯 꿰뚫어 보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주인공이 간파하거나 이해할 수 없거나 심지어 식별조차 불가능한 어떤 힘들에 지배당한다. <카프카, 카프카>는 김혜순 시인, 이기호 소설가, 신형철 평론가 등 국내 문인들이 카프카를 기리며 쓴 글들을 모았다. 이들은 카프카적인 스타일로 쓴 자신들의 시와 짧은 소설을 선보이고, 카프카 작품에 대한 비평을 담은 에세이를 썼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
"이 정도로 낮은 수치의 출산율은 들어본 적도 없어요. 대한민국 완전히 망했네요. 와!" 지난해 미국의 한 교수가 국내 합계출산율(여성 한 명이 평생 낳을 것으로 예상되는 평균 출생아 수)을 듣고 머리를 부여잡으며 이같이 말한 방송이 화제가 됐다. 그가 놀란 숫자는 2022년 기준 합계출산율 0.78명. 절망스럽게도 출산율은 최근 더 떨어졌다. 지난해 4분기 합계출산율은 0.65명을 기록, 집계 이후 처음으로 0.7명에 못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세계적으로 유례없이 낮은 수치다. 뉴욕타임스엔 "(한국의) 인구감소는 14세기 흑사병이 유럽에 몰고 온 인구감소를 능가한다"는 내용의 칼럼이 실리기도 했다. 국내 대표 인구경제학자 중 한 명인 이철희 서울대 교수는 그의 첫 대중서 <일할 사람이 사라진다>에서 낮은 출산율이 상수가 된 대한민국의 미래를 진단한다. 특히 노동시장에 초점을 맞춰 인구감소가 어떤 사회·경제적 충격을 가져오고 어떻게 대처해야하는 지를 다룬다. 인구감소의 규모보다 우려되는 건 속도다. 통계청은 2067년 우리나라 인구가 3500만명으로 줄어들 것이란 전망을 내놓은 바 있다. 15~64세 생산연령인구도 급격하게 떨어진다. 현재 3674만명에서 채 50년도 지나지 않아 절반도 안되는 1658만명(2072년)으로 감소할 것으로 전망된다. 저자는 이같은 속도의 인구감소는 특정 인구 규모에 맞춰진 노동 시장을 비롯해 국가의 여러 시스템에 심각한 불균형을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한다. 가장 큰 불균형이 예상되는 분야는 의료 및 사회복지, 돌봄 서비스 부문이다. 저자는 이 분야들이 인구 고령화로 수요는 폭발하는데 인력 공급은 줄어 심각한 노동력 부족에 직면할 것이라고 설명한다. 사회복지서비스업은 오는 2031년까지 약 37만 명의 노동력이 부족해질 전망이다. 의료를 비롯한 보건업에선 13만 명 이상이 모자라다. 반면 인구가 줄어도 고령자나 아동에 대한 돌봄 및 의료 서비스 수요는 지속적으로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선 인구감소에 대비해 외국인력을 활용하자는 대책을 내놓지만, 저자는 그것이 완전한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지적한다. 필요 수준 이상의 숙련도와 사회에 잘 적응할 수 있는 문화적 배경까지 갖춘 양질의 외국인력은 희소한 자원이라는 설명이다. 더구나 일본, 대만, 싱가포르 등 주변국에서도 적극적으로 외국인을 유치하려는 정책적 노력을 강화하면서 외국인력 확보를 둘러싼 국가 간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저자는 대신 고학력의 고령인구에 주목한다. 미래의 고령인구는 현재의 고령인구에 비해 교육수준이 높다. 지금은 65세 이상 대졸자가 전체 경제활동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낮지만, 2072년엔 35~49세 대졸 경제활동인구 비중과 비슷해질 것으로 추정된다. 고학력의 고령인력이 노동시장의 새로운 주축 인력으로 자리잡으면서 인구감소로 인한 노동시장의 충격을 완화할 수 있단 설명이다. 교육과 기술 혁신 등을 통해 노동생산성을 높이는 것도 방법이다. 노동생산성이 두 배로 높아지면 노동력이 절반으로 줄어도 실질적인 노동 투입 규모를 유지할 수 있다. 교육혁신을 통해 새로운 세대를 더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인재로 키울 수 있다면, 젊은 노동인구가 급감하면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어느 정도 완화할 수 있단 설명이다. 새로운 기술이 사람의 신체적인 힘과 인지능력을 보완해 생산성을 높일 수도 있고, 자동화와 로봇, 인공지능 기술 등을 활용하면 노동력을 대체하는 것도 가능하다. 현재 인구문제와 관련한 정부 정책과 사회적 인식은 저출산 완화에만 집중하는 경향이 있다. 매년 추락하는 합계출산율을 강조하며 미래를 우려하는 목소리는 크지만, 이미 인구감소 국면에 접어든 현실에 어떻게 차분하게 대응할지 통찰하는 목소리는 상대적으로 드물다. 노동시장을 중심으로 인구변화 대응 방안을 이야기하는 이 책을 주목할 만한 이유다.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