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르겠는가/내 볼에 와 닿던 네 입술의 뜨거움/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던 네 숨결"(신경림, <가난한 사랑노래> 中)수십년 넘게 많은 독자들이 애송하는 시 중 하나인 <가난한 사랑노래> 등을 쓴 문학계 거목 신경림 시인이 22일 별세했다. 향년 88세. 암으로 투병하던 신 시인은 이날 오전 경기 일산 국립암센터에서 숨을 거뒀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질 예정이다.고인은 1936년 충북 충주에서 태어나 충주고와 동국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동국대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56년 '문학예술'에 시 <갈대>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까맣게 몰랐다./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그는 몰랐다."(<갈대> 中)등단 후 10여년 간 시를 쓰지 않고 고향 충주로 낙향해 농사일부터 공사장 인부, 장사, 학원 강사 등 갖은 일을 했다. 이때 경험은 고인이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의 삶을 시에 담아내는 데 자양분이 됐다.1971년 발표한 시 <농무>는 농촌 현실과 농민의 삶, 핍박받는 민중의 애환 등을 노래했다. 그는 이 시에서 '비료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를 잊고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시고, 풍물놀이에 맞춰 '고갯짓을 하고 어깨를 흔들거'리는 농민의 삶을 사실적으로 형상화했다. 고인의 시는 질박한 생활 언어로 현실을 노래한 '민중적 서정시인'이란 평가를 받는다.생전에 만해문학상, 대산문학상, 호암상 등을 받았으며 2001년 은관문화훈장을 수훈했다. 고인의 장례는 주요 문인단체들이 함께하는 대한민국 문인장으로 치를 계획이다. 신연수 기자 sys@hankyung.com
“시가 민들레처럼 나타나 모든 이를 형제자매로 만들어주지.” 언젠가 당신이 한 말씀이 떠올라 회사 화단에 핀 민들레를 매일 들여다보았다. 노란 잎이 투명해지며 하늘로 날아가던 날 “그래, 민들레 홀씨처럼 가벼워져야겠다. 기도조차 하늘에 닿으려면 가벼워져야겠다. 좋은 마음을 붙들지 않고 나누며 퍼트려야겠다”라고 내 서랍 속 낡은 수첩에 적었다.언젠가 당신이 수녀원을 거닐며 말씀했다. “라일락 잎사귀를 씹어봐. 쓰디쓴 사랑의 맛이지.” 나는 초록 잎사귀 한 장을 떼어 씹곤 “정말로 씹는 사랑은 쓰다”라고 휴대전화 메모장에 적었다.“늘 등꽃처럼 겸손해야지.”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 애쓰지 않아도 돼.” “힘든 삶이었지만 명랑하게 살았지.” “꽃 사이를 걸으면 꽃이 되지.” “언제나 동그란 마음으로 살아야지.” 당신의 말씀이 나를 시의 자리로 이끌고 갈 때마다 나는 부끄러웠다. 당신을 뵌 날에는 시란 무엇일까 생각한다. 아직 내가 고작 쓸 수 있는 시란 내가 쓰는 게 아니라 무언가를 받아적는 것이다. 내가 쥔 펜 속에 늘 흰 잉크가 있는 건 경험이 빈약하거나 결핍이 충분치 않거나 연마가 부족한 탓이다. 실은 나는 등잔불 꺼진 어둠을 견딜 배짱도 없고, 용광로 같은 분노도 없고, 빙하 같은 고요도 없고, 붉은 토마토처럼 깨질 용기도 없고, 어떤 각성도 없다. 당신은 그런 내게 말씀했다. “성태도 시집을 내야지.”올해는 이해인 수녀님이 수녀원에 입회한 지 60주년이 되는 해다. 지금 나는 수녀님이 오랜 기간 글방에서 쓴 시와 일기, 서랍 속에 모아둔 엽서와 편지, 눈빛을 나눈 사람과 사물에 관한 이야기를 모아 책을 만들고 있다. 시를 쓰는 마음으로 한 자, 한 자 들여다본 책이 곧 인쇄를 앞두고 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글 한 편, 한 편을 읽으며 사라지고 남은 문장과 사라진 문장과 사라질 문장을 나는 떠올린다. 돌이 의도해 응축되지 않은 것처럼, 꽃이 계획해 잎을 꺼내지 않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단단하고 향기로운 수녀님의 글을 독자들과 나누고 싶다.수녀님의 단상집을 만들기로 한 날부터 수녀님이 쓴 시집과 산문집을 틈틈이 낱낱이 읽었다. 그중 연필처럼 내 곁에 둔 시집이 <민들레의 영토>다. 이 시집은 수녀님의 첫 시집으로, 1976년 출간된 이래 반세기가 가까운 지금까지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다.“기도는 나의 음악/ 가슴 한복판에 꽂아 놓은/ 사랑은 단 하나의/ 성스러운 깃발”이란 시구로 시작하는 국민 애송시 '민들레의 영토'를 나도 좋아하지만, 내가 이번 신간을 편집하면서 자주 읽은 시는 '별을 보면'이다.이 시는 수녀님이 예비 수녀 시절인 1966년에 쓴 시로, “하늘은/ 별들의 꽃밭// 별을 보면/ 내 마음은/ 뜨겁게 가난해지네”로 시작한다. 내가 특히 자주 읊는 시구는 “내 작은 몸이/ 무거워/ 울고 싶을 때// 그 넓은 꽃밭에 앉아/ 영혼의 호흡 소리/ 음악을 듣네”인데, 내가 주저앉고 싶을 때 나를 꽃밭으로 데려가 어둔 마음에 밝은 빛을 들여놓기 때문이다.“오늘은 어제보다/ 죽음이/ 한 치 더 가까워도// 평화로이/ 별을 보며/ 웃어 주는 마음// 훗날/ 별만이 아는 나의 이야기/ 꽃으로 피게// 살아서 오늘을 더 높이/ 내불던 피리/ 찾아야겠네”란 구절을 읽을 때는 한 방송에서 눈물 빛을 내비친 수녀님의 모습이 떠오른다.수녀님은 첫 시집 끝에 이렇게 부기했다. “‘너’ 없이 태어날 수 없던 ‘나’의 시는 또한 ‘우리’의 것이 될 수도 있겠기 때문입니다.” 수녀님은 ‘남에게 나에게 해주길 기대하는 것을 남에게 내가 먼저 해주는 기쁨’을 자주 말씀한다. 바닷가에서 주운 조가비나 돌멩이에 ‘기쁨’ ‘침묵’ ‘인내’ ‘기도’란 단어를 적어 글방에 온 손님들에게 선물한다. 마른 나뭇잎들, 꽃잎들로 독자에게 보낼 카드를 만든다. 떨어진 솔방울을 사람들 손에 건네며 솔 향기를 떠올리게 한다. 그런 수녀님이 쓴 시는 그 시를 쓴 마음이 고와서 달빛 별빛 햇빛처럼 다가온다. 어떤 시집은 그 시집 앞에서 두 손을 모으게 한다. 어떤 시구는 시인의 모습을 떠오르게 해 우리를 울고 웃게 한다. 이해인 수녀님의 시집과 이해인 수녀님이 내겐 그러하다. 몇 번의 계절을 담은 사진 촬영 마지막 날, 수녀님이 흰옷을 입고 천사처럼 이렇게 말씀했다. “날마다 크리스마스처럼 살기로 했지.” 백 번 치는 종소리보다 한 번 치는 종소리가 마음속에 깊이 울려 퍼지는 순간이 있듯, 당신의 그 한 말씀이 내 가슴속에 종소리처럼 남아 나를 종종 울린다.김성태 김영사 편집자
세계 최고 권위 있는 문학상 중 하나인 부커상 수상이 불발된 황석영 작가가 "더 열심히 쓰겠다"고 말했다.부커상 위원회는 지난 21일(현지시간) 영국 런던 테이트모던에서 열린 부커상 시상식에서 올해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작으로 <카이로스>를 쓴 독일 소설가 예니 에르펜베크를 선정했다고 밝혔다. <카이로스>는 1980년대 말 베를린 장벽 붕괴라는 유럽 현대사의 격동기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두 남녀의 이야기다.황 작가의 <철도원 삼대>는 올해 최종 후보작 6편 중 이름을 올렸지만 수상이 불발됐다. 부커상 위원회는 지난해 5월 이후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번역 출간된 소설 149편을 심사해 1차 후보작 13편, 최종 후보작 6편을 추렸다. 올해 최종 후보는 △셀바 알마다(아르헨티나)의 <강이 아닌(Not a River)> △옌테 포스트후마(네덜란드)의 <내가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What I'd rather not think about)> △이아 겐베르크(스웨덴)의 <디테일들(The Details)> △이타마 비에이라 주니어(브라질)의 <구부러진 쟁기(Crooked Plow)> 등이다. 황 작가는 앞서 2019년 소설 <해질 무렵>으로 부커상 1차 후보에 오른 바 있다. 황 작가는 시상식 후 언론 인터뷰에서 "(한국 독자들이) 속상해하실 것 같다"며 "응원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러면서 "더 열심히 쓰겠다"고 담담하게 말했다.<철도원 삼대>는 철도 노동자 삼대와 공장 굴뚝에서 고공농성을 하는 해고 노동자를 통해 한반도 근현대사를 담아낸 소설이다. 앞서 열린 부커상 인터내셔널 최종후보 낭독회에서 황 작가는 "세계 여러 작가가 절필할 나이지만, 나는 조금 더 쓰려고 한다. 세 편을 더 쓸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부커상은 노벨문학상과 프랑스 공쿠르상 등과 함께 세계 3대 문학상으로 꼽힌다. 부커상 인터내셔널은 영어로 번역된 비영어 문학작품을 대상으로 시상한다. 올해 수상엔 실패했지만 한국 소설은 최근 3년 연속 부커상 인터내셔널 최종 후보에 올랐다. 2022년엔 정보라 작가의 <저주토끼>가, 지난해엔 천명관 작가의 <고래>가 후보에 오른 바 있다.신연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