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기업들의 올해 연례 보고서에서 ‘다양성, 형평성, 포용성(DEI)’을 언급하는 문구가 사라진 것으로 나타났다. DEI 프로그램이 추구하는 ‘워크(woke·깨어 있는) 자본주의’에 대한 반발 심리가 커지자 기업들이 선제적인 대응에 나섰다는 분석이다.

21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미국 기업들이 증권거래위원회(SEC)에 제출한 ‘10-K’(연차보고서)를 검토한 결과, DEI에 대한 장기 목표가 사라졌다고 분석했다. DEI는 정부와 대학, 기업이 채용 및 보상 절차에서 인종과 성별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사회적 기조를 말한다.

미국 백화점 콜스는 올해 연차보고서에 “다양한 리더를 선발하겠다”는 원칙을 삭제했다. 이는 콜스가 지난 3년간 연차보고서에 제시한 목표였다. 비디오게임 소매업체 게임스톱도 기업 비전에서 ‘다양성과 포용성’을 뺐다.

백화점업체 노드스트롬은 과거 흑인 및 라틴계 임원이 운영·디자인한 브랜드의 매출 목표치를 5억달러로 제시했다. 관리자 직책에도 비(非)백인을 절반가량 채용하기로 공표했다. 하지만 올해 이런 수치들을 모두 제거했다. 정보기술(IT) 업체 세일즈포스도 전체 직원의 40%를 여성 또는 성소수자로 채우겠다는 목표를 지웠다.

기업들이 DEI를 축소한 배경에는 정치적 갈등이 있다. 지난해 6월 미국 연방대법원이 대학 입학 절차에서 소수 인종을 우대하는 ‘적극적 우대 조치’에 대해 위헌 결정을 내린 뒤 진보층과 보수층 간 갈등이 심화하면서다. 사회적 갈등으로 증폭되자 워크 자본주의에 대한 반발심리가 확산하는 분위기다. 금융정보업체 모닝스타 애널리스트인 린제이 스튜어트는 WSJ에 “최근 기업이 감수해야 하는 정치적 위험도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있다”고 해석했다.

워크 자본주의에 대한 역풍도 거세다. DEI 프로그램을 적극 확대하는 기업에 대한 소송이 빈번해졌다. 지난해 스타벅스는 2025년까지 총직원의 30%를 유색인종으로 구성한다는 목표를 세운 뒤 법적 분쟁을 겪었다. 통신사 컴캐스트도 소수인종과 여성 등이 51% 이상 지분을 가진 중소기업에 보조금을 지급하다가 차별금지법을 위반한 혐의로 고발됐다.

최고경영자(CEO)의 신변을 위협하는 사례도 있다. 지난해 래리 핑크 블랙록 CEO는 평년보다 3배 이상 많은 경호 비용을 지출했다. 세계적인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열풍을 일으킨 그를 겨냥해 일각에서 비판 수위를 높이는 것에 대해 핑크 CEO가 신변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이달 초 제출된 블랙록의 임원 보수 공시에 따르면 그는 지난해 자택 보안 시스템 업그레이드에 56만3513달러를 지급했다.

오현우 기자 ohw@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