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전세사기 이 모 씨가 거주하고 있는 다가구 주택. 이 건물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임차인이 보증금을 돌려 받지 못한 상태다. /출처=네이버 지도
대전 전세사기 이 모 씨가 거주하고 있는 다가구 주택. 이 건물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임차인이 보증금을 돌려 받지 못한 상태다. /출처=네이버 지도
"공인중개사가 전세보증금반환보증 가입이 원래 안 되는 매물이라고 했어요. 관련 법을 잘 알고 임대차계약을 도와주는 공인중개사가 염려 말라고 하니 믿을 수밖에 없었죠. 신혼부부라 보증금 1000만원 깎아준다는 말에 고맙기까지 했어요. 뉴스에서나 보던 전세 사기 피해자가 졸지에 되고 보니 갓 태어난 아기 자는 얼굴만 봐도 막막하고 눈물이 납니다."

대전 전세사기 피해자인 직장인 이상기(가명.29) 씨는 전세 계약을 맺은 지난해 7월을 떠올리며 이같이 말했다. 이씨는 지난해 8월 임차 보증금 1억2000만원의 대전 소재 신축 다가구 주택을 신혼집으로 계약했다. 이때 내린 선택은 한창 신혼 생활의 행복을 누려야 할 이씨 부부를 고통의 수렁으로 빠트리고 말았다.

"나라는 제대로 된 대책도 없고 더는 버티지 못하겠다."

지난해 2월 28일 인천 미추홀구에선 전세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 사기 피해자 한 명이 극단적 선택을 하기 전 남긴 메시지다. 같은 해 6월 말에도 대전 다가구주택에 거주하던 한 50대 전세사기 피해자가 숨진 채 발견됐다. 특별법이 제정된 이후 처음으로 알려진 전세사기 관련 희생자다. 그 또한 사망 당일 아침 다른 피해 세입자들에게 "돈 받기는 틀렸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2월 국토교통부 '전세사기피해지원위원회'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전세사기 특별법 시행 후 지난해 6월부터 누적 집계된 전세사기 피해 건수는 총 1만2928건이다.

피해자의 73.5%는 이씨와 같은 2030 청년 세대다. 임차보증금이 3억원 이하인 경우가 96.8%에 달한다. 피해 지역의 경우 63.7%가 수도권이며, 대전광역시가 12.7%로 뒤를 이었다. 1억원대 빌라 전세를 시작으로 청년들은 돌려받지 못한 보증금 때문에 결혼, 출산 등 미래에 대한 계획을 모두 접어야 할 상황이다.

한 차례 계약 파기, 발 동동 구르던 신혼부부 홀린 조건

이 씨가 계약한 다가구 주택의 등기부등본. /사진=피해자 제공
이 씨가 계약한 다가구 주택의 등기부등본. /사진=피해자 제공
이씨도 지난해 여름 예산 내에서 빠른 입주가 가능한 전셋집을 알아보기 위해 분주했다. 그때 인근의 부동산에서 지금 거주하고 있는 집을 보여줬다. 이씨에 따르면 당시 중개사는 "사실 잘 안 보여주는 귀한 집인데 신혼부부이기도 하고, 급해 보이니 보여준다"는 말로 그를 홀렸다. 직장 접근성도 좋은 신축 빌라였다.

중개사는 "원래 임차보증금 1억3000만원인데 신혼부부라 보증금을 1000만원 깎아주겠다"며 "냉장고와 에어컨까지 신형으로 설치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단, 전세보증금 반환보증보험 가입은 어렵다고 했다. 중개사는 "원래 보험 가입이 안 되는 매물인데 괜찮다"는 말로 이씨를 안심시켰다. 이씨는 "지금 생각해보면 더 확인해봤어야 했는데 공인중개사의 말이니 믿어도 된다고 생각했다. 이어 "1~4층에 각 두 집씩 살고 있었는데 우리가 입주하는 집을 제외하고 모두 임차인이 거주하고 있었다"며 "건물을 담보로 근저당도 설정돼있었지만, 임대인이 한 사람이고 건물 시세에 비하면 큰 금액이 아니라고 하길래 문제없을 거라 여겼다"고 털어놨다. 부동산 관련 법 규정을 잘 모르는 일반인에게 임대차계약을 도와주는 공인중개사의 말은 절대적일 수밖에 없었다.

임차보증금 1억2000만원으로 계약을 맺었다. 계약 당일에는 임대인 본인이 직접 방문해 도장도 찍었다. 이씨는 "값비싼 차를 몰고 온몸에 명품 옷을 휘두르고 나타난 임대인의 차림을 보고 집이 경매로 넘어갈 거라는 상상을 못 했다"고 회상했다.

"그러게 잘 알아보지 그랬어" 피해자 탓하는 사회

이씨 부부는 신혼부부 전세자금 대출 9000만원을 더해 신혼집을 계약했다. 대출금으로 발생하는 월 이자는 약 23만원이다.

이씨가 수상한 낌새를 알아차린 시점은 지난해 11월이다. 4층에 살던 신혼부부가 "계약이 만기 돼 다른 곳으로 이사가려 하니 집주인이 보증금을 돌려주지 않는다. 잘 알아보고 계약했느냐"고 물어왔다.

이렇다 할 대비를 하기도 전에 일련의 사건들이 쏟아졌다. 12월 초가 되자, 임대인이 한국토지주택공사(LH)를 속여 159억원의 임대지원금을 갈취한 혐의로 수감돼있다는 뉴스를 접하게 됐다. 전세 계약을 맺은 공인중개업소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연락도 받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아이는 태어났다. 육아로 바쁜 나날을 보내는 와중에도 집에 대한 불안감은 지속됐다. 1월에는 이씨가 사는 건물의 경매개시결정이 났다. 경매로 집이 팔리면, 이씨도 즉시 집을 비워야 하는 상황이다. 이씨는 "이 집이 언제 경매로 팔릴지 몰라 이제 이사할 집을 구해야 한다"며 "이젠 집을 알아보고 계약하는 과정 자체가 두렵다"고 털어놨다.
건물 사건 내역. /사진=제보자 제공
건물 사건 내역. /사진=제보자 제공
현재 이씨는 '전세사기 피해자 결정 신청'을 해두고 승인 여부를 기다리는 중이다. 피해자로 인정받게 되면, 공공임대주택 신청 자격과 전세보증금 대출 이자 지원 등의 구제책의 대상이 된다.

임대인에게 민사 손해배상 소송으로 보증금을 돌려받지 않는 이상, 증발한 전세 보증금 1억2000만원은 온전히 이씨 부부가 갚아야 한다. '대출을 대출로' 상환해야 하는 상황이다. 이씨는 "전세사기 피해자로 인정받으면 그때부터 싸움 시작"이라며 "긴 소송 싸움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벌써 힘들다"고 토로했다.

끝으로 이씨는 "그러게 잘 알아보지 그랬니"라는 말이 가장 상처로 남는다고 전했다. 그는 "명백하게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가 있는데도 피해자 탓을 하는 구조가 마음이 아프다"고 말했다. 이어 "그래서 주변인에게 피해 사실을 알리는 것이 더 힘들었다"고 덧붙였다.

이씨가 주변 지인들에게 들은 말처럼 '잘 알아본다'고 하더라도, 부동산 시장에서 자본금이 부족한 청년 세입자는 작정한 임대인에게 당하기 십상이다. 이씨가 거주하고 있는 집의 임대인은 무려 600여명의 피해자를 양산한 전세 사기범이다. 미반환 보증금만 1000억원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임대인은 앞서 저지른 범죄 혐의에 대해서도 재판을 받는 중이다. LH가 운영하는 '전세임대주택 지원제도'를 악용해 LH에 제출하는 선순위 임차보증금 확인서에 보증금을 축소 혹은 허위로 기재한 뒤 제출하는 방식으로 2020년 4~5월 '깡통주택' 155채에 대한 전세 임대차보증금 약 159억원을 가로챈 혐의를 받고 있다.

이리저리 뛰어다닌 시간과 비용, 심리적 압박감과 스트레스, 육아까지 버틸 수 없게 된 이씨는 결국 지난달 다니던 회사도 휴직했다.

"가정을 꾸렸는데 당장 주거가 불안정한 상황에 닥치면 압박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전세사기를 당하면 그때부터 피해자가 모든 상황을 혼자서 헤쳐 나가야 하고요. 직장생활도 제대로 할 수 없고 둘째 출산은 꿈도 못 꿔요. 빌라에서 어렵게 시작하는 청년, 신혼부부 수백명이 정식 공인중개사를 통해 계약을 진행했음에도 이런 피해를 당했는데 이런 사회에서 결혼하고 출산하라고 장려하는 게 맞는 건가요?"

김영리 한경닷컴 기자 smartki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