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5일 오후 3시 한미약품이 5조원대 기술수출에 성공했다는 속보가 뜨자 여의도 증권가가 들썩였다. 한미약품은 이튿날 조간신문 1면을 장식했고 장이 열리자마자 상한가로 직행했다. 직전 해 6만원대였던 주가는 1년 만에 70만원까지 치솟았다. 그해 주식시장의 ‘라이징 스타’는 단연 한미약품이었다.

그로부터 8년 뒤 한미약품이 다시 세간의 주목을 받고 있다. 경영권을 둘러싸고 오너가의 ‘남매의 난’이 격화하면서다. 잇단 계약 해지와 분쟁으로 주가는 반토막이 났고 핵심 연구개발(R&D) 인력도 빠져나가고 있다. 이 회사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수출 8조' 한미약품의 시련…가족전쟁 시작은 상속세였다

빛바랜 기술수출 신화

한미약품에 이상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한 건 2020년 8월 창업주 임성기 회장이 별세한 이후부터다. 임 회장은 두 가지 약물을 합치거나 지속 시간을 늘리고 제형을 바꾸는 개량신약으로 회사를 글로벌 제약사 반열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한미약품은 신약 불모지인 한국에서 개량신약 기술 하나로 세계 시장을 뚫었다. 2015년 베링거인겔하임, 일라이릴리, 사노피, 얀센 등에 6건의 기술수출을 성사했다. 그해 기술수출 규모는 8조원에 달했다. 작년 국내 제약사 전체 기술수출 규모와 맞먹는다.

임 회장은 2016년 1월 개인 주식 90만 주(지분율 4.3%)를 전 직원 2800명에게 무상 증여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직원 1인당 받은 주식은 4000만원 규모였다. 한미약품은 취업준비생이 가고 싶은 기업 상위권에 오르내렸다.

투자자들도 ‘텐배거’의 등장에 환호했다. 한미약품은 제약·바이오 투자 열풍을 만든 주역이다. 그러나 2016년 9월 베링거인겔하임이 기술수출 계약을 해지하면서 위기를 맞았다. 내부 정보를 미리 알고 주식을 판 임직원이 적발되면서 회사 이미지도 악화했다. 당시 압수수색 과정에서 회사를 이끈 임종윤 한미사이언스 대표에 대한 책임론이 불거지며 내부 갈등이 시작됐다는 시각도 있다.

상속세가 불붙인 분쟁

임 회장은 당초 장남인 임종윤 한미약품 사장을 중국 법인에 보내 경영 수업을 시켰다. 그러나 임 사장은 디엑스앤브이엑스(DXVX)와 코리그룹 등을 설립해 디지털 헬스케어에 집중했다. 그 사이 장녀 임주현 한미약품 사장은 본사에서 기획을 담당하며 세력을 키웠다. 겉으로 도는 장남에게 불만이 있던 모녀가 힘을 합쳤고, 이에 대항하려는 장남이 남동생을 끌어들여 현재의 분쟁 구도가 형성됐다는 게 제약업계의 분석이다.

후계 구도가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창업주의 유산은 분쟁의 시초가 됐다. 임 회장의 배우자인 송영숙 한미약품 회장과 자녀 3명이 상속받은 주식은 1조원 규모다. 상속세로 5400억원을 내야 한다. 송 회장이 2000억원, 세 자녀가 각각 1000억원 이상을 부담하는 구조다.

송 회장은 2021년 은행·증권사로부터 700억원 규모의 주식담보 대출을 받았다. 세 자녀도 1000억원을 대출받았다. 그러나 고금리 기조가 이어지면서 이자 부담이 커졌고 송 회장과 임주현 사장(모녀)은 사모펀드(PEF) 운용사인 라데팡스파트너스에 일부 지분 매각을 추진했다. 하지만 장남 임종윤 사장과 차남 임종훈 한미약품 사장(형제)이 외부인의 갑작스러운 등장을 탐탁지 않게 생각하면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라데팡스에 지분을 매각하는 방식은 주요 출자자인 MG새마을금고가 작년 7월 부실 논란으로 ‘뱅크런’ 사태를 맞으며 무산됐다. 라데팡스는 친분이 있던 OCI그룹을 모녀에게 소개했고 한미사이언스와 OCI 간 통합을 추진했다. 송 회장은 이우현 OCI그룹 회장의 모친 김경자 송암문화재단 이사장과 오랜 기간 가깝게 지내면서 신뢰를 쌓은 관계다.

OCI와 통합은 모녀 주도로 진행됐다. 이 과정에서 배제된 형제가 반발하면서 올초부터 양측의 폭로와 비방전이 격화했다. ‘남매의 난’은 주총 이후에도 장기간 한미약품을 뒤흔들 전망이다. 이 와중에 한미약품에 눈독을 들인 PEF들까지 양측에 러브콜을 보내는 등 갈등은 복잡한 구도로 흘러가고 있다.

한 투자은행(IB)업계 관계자는 “한미약품은 창업자가 작고하자마자 유족 간 갈등이 불거졌고, 상속세 해법을 제대로 못 찾은 데다 회사가 나아갈 방향에 대한 이견도 극복하지 못했다”고 했다.

전예진 기자 ac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