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기사 내용은 무관./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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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일(현지시간)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과 올해 상반기 EU 의장국인 벨기에의 알렉산더르 더크로 총리 등 각국 정상급 인사들이 브뤼셀의 아토미움 앞에 모였다. 이들은 브뤼셀 엑스포에서 하루 일정으로 열린 원자력 분야 최초의 다자 정상회의에 초대받은 인사다. 아토미움은 지름이 18m에 달하는 9개 구를 12개 선으로 연결해 만든 102m 높이의 초대형 건축물이다. 철 원자를 1650억 배 확대한 모습으로, 핵분열 순간을 형상화했다. 1958년 만국박람회 유치국이었던 벨기에가 원자력 에너지의 평화적 이용을 홍보하기 위해 세웠다.

○“원전 없이 기후 대응 불가”

그로부터 약 70년이 흐른 현재 세계 각국에서 ‘원전 신화’가 되살아나고 있다. 벨기에와 이번 회의를 공동 주최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라파엘 그로시 사무총장은 “우리는 원자력 에너지의 발전 용량을 키우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한다”며 “원자력은 중요한 역할을 부여받았다”고 말했다. 1986년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등을 기점으로 선진국들의 정서를 지배했던 ‘원전 포비아’는 온데간데없어진 채 “잠들어 있던 원전을 깨우자”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다. AP통신은 “10여 년 전이었다면 상상도 못 했을 일”이라고 평가했다.
美·유럽, 10여년 만에 '親원전 유턴'…"가장 저렴한 넷제로 달성법"
주요국이 앞장서 ‘원전 유턴’에 나선 배경에는 기후 위기가 핵심 요인으로 작용했다. 파티 비롤 국제에너지기구(IEA) 사무총장은 “원전 없이는 기후 목표를 제때 달성할 수 없다”며 “태양광·풍력·수력 등 재생에너지도 중요한 역할을 하겠지만, 기반 시설이 갖춰지지 않은 국가에선 원자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작년 12월 제28차 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COP28)에서 한국을 포함한 22개국이 2050년까지 세계 원자력 에너지 발전 용량을 2020년 대비 세 배로 늘리기 위해 협력하자고 합의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원전은 ‘2050 넷제로(탄소중립)’라는 글로벌 기후 목표 달성에 필수적인 에너지로 평가되지만 그 비중은 전 세계 전력 발전량의 10%에도 못 미친다.

○‘반핵’ 獨 지고 ‘친핵’ 佛 뜨고

이 같은 변화는 유럽에서 두드러진다. EU 역내 생산 전력의 21.8%(2022년 기준)가 원전에서 나온다.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주도한 반핵 정서에도 불구하고 원전 의존도가 높게 유지되던 상황에서 러시아로부터의 ‘에너지 독립’ 필요성까지 불거졌다. 현재 EU 내 12개국에서 100개 원자로가 가동되고 있고, 전 세계에서 약 60개가 건설 단계에 있다. 일부 국가는 러시아산 기술과 농축 우라늄에 의존하고 있는 상태다.

프랑스를 필두로 친(親)원전 국가의 영향력이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2년 새 급속도로 커졌다. 프랑스는 EU 전체 원자력 발전량의 48.4%를 생산하고, 전체 투자액의 3분의 2를 책임지는 ‘원전 강국’이다. 불가리아 크로아티아 체코 핀란드 헝가리 네덜란드 폴란드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등 10개국과 이른바 ‘원자력 동맹’ 구축에 나섰다.

이날 정상회의에서 채택된 선언문에는 이들 국가 외에도 이탈리아 루마니아 스웨덴 등 독일·오스트리아를 제외한 유럽 국가 대부분이 서명했고, 미국도 가세했다. 존 포데스타 미 백악관 국제기후정책 선임고문은 “세계은행을 포함한 국제 개발은행의 원전 지원 제한 규정을 없애려는 프랑스의 계획을 지지한다”고 말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도 “원전 모델 덕분에 프랑스는 몇 안 되는 전력 수출국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며 “이번이 기회이며, 석탄·가스에서 벗어나 원전·재생에너지로 나아가는 것이 최우선 순위”라고 말했다.

서명국들은 최고 수준의 안전성이 보장된 신규 원전 건설과 소형모듈원자로(SMR)를 포함한 첨단 원자로의 조기 배치, 핵연료 공급 등의 자원 안보 분야 협력에도 합의했다.

다만 블룸버그통신은 “15개 EU 회원국이 SMR 개발에 관심을 보였지만 실제 생산까지는 최소 10년 이상 남아 있고 중국과 러시아에선 이미 가동 중”이라며 유럽에서의 원자력 부흥 움직임이 시기를 놓쳤다고 지적했다.

장서우 기자 suwu@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