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 가옥 사이 새하얀 코끼리가 자리를 잡고 누웠다. 까무룩 세상모르고 잠이 든 작은 동물의 마법이 퍼진 듯,어느새 시골 마을 전체가 깊은 고요에 잠긴다.
날것 그대로의 매력이 느껴지는 코끼리잠의 외관. 사진=노경
날것 그대로의 매력이 느껴지는 코끼리잠의 외관. 사진=노경

땅이 건물을 감싸안은 듯 포근하다

제주시 애월읍의 한 동네, 하얗고 조용한 건물 하나가 대지에 폭 안겨 있다. 이 작은 마을을 비롯한 인근 부지는 도로보다 낮아 대체로 건물이 높지 않다. 낮은 땅은 배수가 어렵고 빗물이 유입될 가능성이 있다. 창문을 통해 길을 지나는 사람과 눈을 마주칠 수도 있다.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토목공사를 제안할 법도 하다. 하지만 건축가는 낮고 고요한 동네의 환경을 해치지 말아야겠다고 가장 먼저 생각했다.

대지를 고려해 배수와 방수를 조금 더 신중하게 설계했다. 건물을 높이는 대신 객실과 골목 사이에 툇마루 같은 중간 공간을 마련했다. 낮은 대지의 특성을 그대로 유지한 덕에 건축물 안에 들어서면 코끼리 품에 안긴 듯 포근함이 느껴진다.
낮은 대지가 건물을 감싸안은 듯하다. 사진=노경
낮은 대지가 건물을 감싸안은 듯하다. 사진=노경

개방과 폐쇄 사이

어느 정도 설계가 진행된 상황에서 건축주는 코끼리를 떠올렸다. 대지에 사뿐히 올라선 건물의 형태가 마치 몸을 웅크린 채 잠을 청하는 코끼리 같다고 생각했다. 후에 건물의 디테일 등을 결정하는 데는 ‘코끼리잠’이라는 이름이 영향을 미쳤다. 건축가는 잠든 코끼리를 떠올리며 공간을 완성해나갔다.
골목과 건물 사이 중간 공간을 마련해 낮은 대지가 주는 포근함을 살렸다. 사진=노경
골목과 건물 사이 중간 공간을 마련해 낮은 대지가 주는 포근함을 살렸다. 사진=노경
건물 안에 깃든 두 개의 숙소와 하나의 주거 공간은 서로의 영역을 방해하지 않도록 분리된 동으로 존재한다. 건축주 부부를 위한 주거 공간과 손님 영역 사이에는 주방과 다용도실을 두고, 각각 마당을 마련했다. 외부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창을 내 자칫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는 낮은 대지의 장점만을 살렸다. 욕실에 낸 하부창 역시 은근한 개방감을 선사한다.

자연에서 자연을 창조하는

인간이 창조할 수 없는 단 하나, 자연이다. 자연과 잘 어우러지는 건물을 만들기 위해 건축가는 자연 재료를 택했다. 건물의 외벽에 사용된 콘크리트 역시 자연에서 온 돌의 일종이다. 콘크리트 특유의 시각적인 무거움을 덜기 위해 최대한 밝은 색감의 시멘트를 선별해 타설했다. 덕분에 코끼리잠의 외관은 날것 그대로의 매력이 살아 있으면서도 올곧다.

내부 공간을 꾸려나가는 데는 건축주의 의견이 반영됐다. 숙박업소 운영 경험이 있는 건축주는 사람이 머무는 공간만큼은 익숙한 재료를 사용할 것을 제시했다. 건물의 콘셉트에 앞서 머무는 사람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그들의 자세가 건축가에게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화이트와 우드톤의 온화한 보금자리는 이렇게 완성됐다.
문을 열고 툇마루처럼 걸터앉을 수 있는 공간. 사진=노경
문을 열고 툇마루처럼 걸터앉을 수 있는 공간. 사진=노경

온전한 쉼, 그리고 공간

건축가 그룹은 ‘사람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공통의 목표를 가졌다. 이 신념은 건물에도 그대로 녹아들었다. “감히 표현하자면, 코끼리잠은 숙박시설의 선생님 같은 존재”라고 말한다. 청소부터 소음, 환기, 온도조절까지 어느 하나 묵는 이를 고려하지 않은 부분이 없다.
마음 편한 코끼리처럼 깊은 잠에 빠질 것 같은 침실. 사진=노경
마음 편한 코끼리처럼 깊은 잠에 빠질 것 같은 침실. 사진=노경
시골의 하루는 일찍 시작돼 일찍 끝난다. 매일 준비되는 정성스러운 조식에는 조금이나마 여유롭게 아침을 열길 바라는 건축주의 깊은 배려가 담겼다. 야생의 코끼리는 짧은 잠을 자는 동물로 유명하다. 하지만 걱정거리가 없는 코끼리는 더 오래, 편안한 잠을 잔다. 애월읍 한쪽에 자리한 작은 코끼리처럼 온전한 휴식을 취할 수 있길, 그들은 바란다.

푸하하하프렌즈(FHHH Friends)

건축가 한승재·한양규·윤한진은 2013년 뜻을 모아 건축사사무소 푸하하하프렌즈를 설립했다. 2014년 ‘김해건축대상’을 시작으로 2016년 ‘서울시 건축상’ 우수상, 2017년 ‘한강여의나루 선착장 국제 설계 공모’ 4등, 2019년 ‘새로운 광화문 광장 조성 설계 공모’ 가작 등을 수상하며 건축 기반의 다양한 디자인 작업으로 인정받았다.

현재 9명의 팀원과 함께 긍정적인 자세로 여러 프로젝트에 임하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코끼리잠, 하이브, 세거리집, 괴산27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