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 잃은 슬픔 딛고 '세상의 리듬' 맞출 힘 미술관서 얻었다"
“벽에 유달리 새까만 부분이 보이죠? 이게 이른바 ‘가드마크’(경비원 흔적)입니다. 경비원들이 늘 여기에 기대어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생긴 자국이지요.”

지난달 25일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한 남성이 10여 명의 관람객 앞에서 기둥 한쪽의 까만 자국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뉴욕 81번가 쪽 입구 근처에는 고대 그리스 조각상이 모여 있다. 신화 속 전령의 신인 헤르메스의 두상이 있는 방 입구에 서서 왼쪽을 바라보면 이 남성이 말한 가드마크가 눈에 들어온다.

이 남성의 이름은 패트릭 브링리(사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가이드 투어로 생계를 꾸려가는 사람이다. 동시에 한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의 저자이기도 하다.

미국 유명 주간지 뉴요커에 근무하던 브링리는 형의 죽음을 겪은 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으로 삶의 행로를 바꾼다. 책에는 미술관에서의 10년 삶이 에세이로 담겼다.

두 살 터울이지만 큰 어른처럼 느끼던 형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뒤 브링리는 브루클린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문득 미술관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작정 앞만 보고 달리던 세상에서 빠져나와 온종일 아름다움만 가득한 공간에서 시간을 보낸다는 게 가능한 일일까’라고 자신에게 물은 것. 무엇에라도 홀린 듯 주저 없이 미술관 경비원직을 지원했다.

인터뷰를 요청한 기자에게 그는 가이드 투어 동행 형식으로 자연스러운 대화를 하자고 권했다. 외견상 브링리는 활달한 사람이었다. 관람객들은 브링리 덕에 경비원부터 청소부, 미술관 내 서점 직원까지 무심코 스쳐 지나쳤을 법한 사람들과도 인사를 나눴다.

브링리가 처음부터 외향적이었던 것은 아니라고 했다. 말수가 적었던 그는 조용히 작품을 감상하는 일을 반복했다. 브링리는 “작품을 보고 있으면 죽음은 인간의 삶에서 누구에게나 닥치는 ‘흔한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며 “죽음과 대면한 예술가들이 표현한 인류 보편의 감정을 느끼면서 그 안에서 위로받았다”고 설명했다.

브링리는 “슬픔 때문에 세상의 리듬에서 벗어나 메트로폴리탄에 왔다”며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미술관 동료들과 어울리며 다시 세상의 리듬에 맞추게 됐다”고 했다. 이 과정을 통해 그는 “영원히 숨죽이고 외롭게 사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고백했다.

가이드 투어가 끝난 뒤 브링리는 기자와 함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2층에 있는 카페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브링리는 가이드 투어에서 작품을 선정하는 기준을 묻자 “그냥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소개할 뿐”이라고 말했다.

미술관을 찾을 이들에게 조언해달라고 하자 “사람들은 미술관에 오면 무언가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보다는 미술관에 왔을 때 자신을 풀어놓는 게 좋을 것”이라며 “‘예술을 공부하려 하지 말고 예술 안에서 배우라(Don’t learn about art, learn from it)’는 말을 꼭 하고 싶다”고 했다.

뉴욕=박신영 특파원 nyuso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