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소설을 어떻게 홍보할지 선배와 고민하다가, 어떤 독자를 타겟팅할 것이냐는 갈림길에 닿았다. 그 독자는 소설을 왜 읽을까? 나는 나 자신을 찾기 위해 소설을 읽는 것 같다고 했고, 선배는 자신과 전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읽을 수 있어 소설이 좋다고 말했다. 그런데 돌아와 곰곰 생각해보니 그 둘이 다를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소설 속 누군가의 이야기가 정말 그럴듯한 이야기로 들리느냐 그렇지 않느냐, 라는 것.

대학 시절의 한 순간, 어떤 소설집을 읽고 감상을 나누는 수업에서 나는 하나같이 소외된 타자들을 다루고 있는 이 소설들이 자신의 이야기라기보다는 남의 이야기라는 인상이 강해 이입하기 어렵다고 평한 적 있다. 그리고 내 감상을 들은 교수님은, 이 소설집 속 아픔에 공감하지 못한다는 것은 비슷한 아픔을 겪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이 문답은 몇 가지 궁금증을 떠올리게 한다. 소설 속 아픔은 같은 아픔을 경험한 사람에게만 공감되는가? 그런 소설은 어떻게 작가 자신과는 다른 타인에게 확장될 수 있는가? 전쟁을 겪지 않은 사람은 전쟁소설을 공감할 수 있는가? 그 소설가와 교수님은 어떻게 그렇게 많은 아픔을 겪었는가(?).

물론 그 교수님의 답은 엄밀한 논증이라기보다는 메마른 인간성의 소유자였던 나를 향한 찰나의 일갈이었으리라. 당시 내겐 소설에 이입하느냐 마느냐를 가르는 관건이 소설가 자신의 이야기인가(‘처럼 들리는가’) 타인의 이야기였다. 그때의 ‘개연성’의 문제가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지금 내게 다가와 있었다.

소설에 개연성이 있느냐 없느냐는 누구에게나 중요한 문제지만, 소설이라는 장르가 어떻게 창작되는지, 그 형식의 개연성에 집착한다면 반드시 걸려넘어지게 되는 허들이 있다. 머릿속에서 인물을 창작해내야 하는 소설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어떻게 ‘진실’처럼 들리게 하는가? 더더군다나 고도의 직업 훈련이 수반되어 소설 쓰기를 위해 시공간적으로 타인으로부터 분리될 수밖에 없는 오늘날의 소설가가 어떻게 ‘육체노동자’의 이야기를 쓸 것인지. 그 한 가지 모범을 최근 <브리스 디제이 팬케이크 소설집>에서 보았다.
소설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어떻게 '진실'처럼 들리게 할까?
‘힐빌리의 헤밍웨이’로 불렸던 브리스 디제이 팬케이크는 스물여섯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의 유일한 소설집은 사후에 출간되었다. 책날개에 적힌 작가 소개에 따르면 브리스 디제이 팬케이크는 “사람이 뜸하고 낙후된 웨스트버지니아의 특성상 어려서부터 노인, 일꾼, 노숙자 등과 허물없이 지내며 애팔래치아 산촌의 고립되고 버려진 황량한 정서와 언어 속에서 컸고 대학원을 다니면서는 출신 지역과 부에 따른 계층의 문제로 절박한 소외감을 느꼈는데 그 모든 것이 천부적이고 진솔한 소설적 자산이 되었다.”

12편의 단편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재개발을 앞둔 쇠락한 마을에서 터전을 지키는 동시에 떠나고 싶어하며 비전이 보이지 않는 농사를 짓고, 더이상 채산성이 없는 금광의 광부이며, 젊은 자신을 잡아두려는 사장의 감언이설과 윽박에 적당히 타협하는 차량 정비공이고, 투계판에 술을 팔거나 내기 복싱으로 돈을 버는 트럭 운전수다. 좋아하는 여자가 있지만 미래를 꿈꾸기에는 당장 모아둔 돈도 없고, 애초에 그녀가 내게 품고 있는 마음도 확실하지 않다. 그녀가 내게 미소를 지을 때면 누추한 세상에 강림한 단 하나의 천사지만, 다른 남자를 바라보거나 등을 보이고 걸어갈 때면 헤픈 여자일 뿐이다. 하루의 일과를 마친 뒤의 시간은 남은 돈을 탈탈 털어 술을 마시거나 가족의 비루한 면모를 견디다가 마을 사람과 싸우고 뻗는 것.

현실이 만족스러울 리 없고 내일에 대한 별다른 사명도 기대도 없다. 그런데, 그들에게서는 내부를 향하는 지나친 자조도 비하도 찾아볼 수는 없다. 누구든 자신과 이 힐빌리를 무시하는 자가 있다면 조용히 한 번의 펀치로 코를 짓이겨줄 만큼의 차갑고 고요한 기세가, 그들의 치열한 하루에 함께하고 있다.

“나는 딱 한 번 낡은 검정 가죽 채찍을 소몰이 채찍으로 사용하다가 그 망할 것의 대가리를 끊어먹은 일이 있는데 아빠는 그놈으로 나를 사정없이 팼다. 나는 아빠가 가끔씩 내 혼을 어쩜 그리 쏙 빼놓곤 했는지 떠올린다. 나는 씩 웃는다.”(<삼엽충>, 36쪽)

“나는 아빠가 쓰러진 지점을 다시 쳐다본다. 그는 오래전 부상에서 얻은 금속 조각이 뇌로 넘어가 폭신한 풀밭에 사지를 벌리고 누워 있었다. 그의 얼굴에 난 풀 자국을 보고 그가 엄청나게 혼이 났겠다 싶었던 일이 떠오른다.”(<삼엽충>, 40쪽)

여기서 나는 이 소설이, 혹은 작가가 무언가 다르다는 걸 느꼈다. 아버지가 어떤 인물이었으며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뿐만 아니라 아버지에 대한 ‘나’의 입체적인 입장, 그것을 표현하는 묘사와 서술의 특별한 모양이 짧은 문장들 안에 깊이 압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굳이 풀어 쓰자면 이렇다는 것이지, 처음 읽었을 때도 그리고 지금도 단지 이렇게 느낄 뿐이다. ‘이 사람은…… ‘진짜’다……!’

무엇이 진짜 노동(자) 소설인지 가르는 기준에서 중요한 것은 노동자가 초점 화자로 등장하느냐, 배경이 노동 현장에 얼마나 핍진하느냐는 아닐 것 같다. 인물이 얼마나 전형으로부터 벗어나 있는지, 두루 가닿도록 보편적이면서도 아직 탐사되지 않은 깊이에 도달해 있는지, 그 인물이 또다르게 고유한 인물들과 만나 어떤 실감나는 조화를 만들어내는지가 아니겠는가.

“엘크 노래를 해서 뭐 하게,” 그가 낄낄거렸다. “됐고, 멀 해거드한테 가서 한 수…….”
“왜요, 빌, 웨스트버지니아 사람인 거 자랑스럽지 않으세요?”
“자랑이야 스럽지, 제기랄, 하지만 그런 노래는 개나 소나 오만 데서 듣는 거잖아. 넌 좋은 건 안 듣는구나, 그렇지?”
보는 의자에 등을 묻고는 히터 밑에 발을 갖다 댔고 냉기가 분간될 만큼 온기가 돌자 자기가 루시를 왜 좋아하는지 결론을 내렸다. 그녀는 진심인 사람이었다.(<여우 사냥꾼들>, 102쪽)

소설을 읽는 것만으로 자신이 자라난 고장과 그곳의 사람들에 대한 핍진한 자부심을 느낀다. 당대의 문화 요소의 풍부한 개입, 누구나 자신의 고향이자 터전에 느끼곤 하는 양가감정, 같은 동네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서로를 향한 정감어린 걱정과 전우애가 묻어나는 대사, 그리고 편안하고 익숙한 분위기까지. 장편소설에서 공과 품을 한참 들여 겨우 쌓아나가야 할 설정들이 단번에 압축적으로 제시되는 장면에 아연함을 느낀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기다린다. 그는 그녀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천천히, 그는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고 제 손바닥 먼지와 엉기는 그녀의 땀을 느낀다. 그는 그녀를 좀 더 이해하게 되고 그녀의 방식을 이해하게 된다.
그는 제 방에 들어가 흰 누더기를 벗어 침대에 놓아둔다. 그는 면도날, 비누, 빗, 자기가 가져온 모든 걸 짐 가방에 담는다. 깨끗한 티셔츠를 뒤집어쓴 다음 그는 짐 가방의 지퍼를 닫고 복도로 나선다. 실라의 방문은 닫혔고, 그러자 오티는 저희 모두를 돌아서게 한 것이 저희를 영원히 겉돌게 하리란 걸 깨닫는다.”(<가뭄에>, 249쪽)

그리고 인생에 대해 웅변하지 않으면서 어딘가를 가리키는 심오한 경지. 힐빌리의 사람들에 대해 가능한 한 모든 것을 가까스로 그려내려는 이 소설들은 그러면서도 인생의 교훈이라 할 만한 것들을 성마르게 일러주려고 낑낑거리지는 않는다. 마치 그런 것은 단번에 포획되지 않는다는 걸 우리 모두 알지 않느냐고, 이 상황과 독백들로 충분하다고, 여러분이 이미 짐작하고 느끼듯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브리스 디제이 팬케이크는 “보통 10교 이상의 교열을 거쳤다고 한다.”(편집자에게는 소름끼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서도 이 소설들은 정말 재능의 발현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20대 중반의 나이였던 팬케이크가 갖춘 깊이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어쩌면 그만큼 섬세하고 예리한 시선을 갖추고 태어났기에 세상과 펜을 동시에 놓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것만큼은 끝내 부정하고 싶지만.

그토록 삶을 쏟아부은 노력과 진정성으로 결정화한 소설들을 읽는 동안, 정말로 소설은 고도의 전문적인 기술이며, 스스로 어떻게 고유할 것인지 고민하되 소설 내적으로 증명해야 하는, 외롭고도 지고한 경지의 예술이라는 진실을 새삼 깨달은 뒤, 그런 소설을 읽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조금은 이기적으로 위안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