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백 투 더 퓨처'의 한 장면. 요한 페르손 제공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백 투 더 퓨처'의 한 장면. 요한 페르손 제공
본체 여기저기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고철덩이들을 매단 은색 스포츠카가 마치 마법에 걸린 듯 가볍게 공중에 떠오른다. 이어 수백 명의 사람 머리 위로 다가온 자동차는 제자리에서 위아래 방향으로 360도를 빙빙 도는 진기한 묘기를 선보이더니,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듯 돌연 방향을 틀고선 시야에서 사라진다. 화려한 영상 편집 기술로 만들어 낸 ‘허구’가 아니다. 시간 여행을 소재로 1980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끈 동명의 공상과학(SF) 영화 ‘백 투 더 퓨처’를 각색한 뮤지컬에서 실제로 구현된 장면이다.

거대한 스크린을 그대로 뚫고 나온 듯한 타임머신 자동차 ‘드로리안’의 생동감 넘치는 움직임에 두 눈이 동그래진 관객들은 참을 수 없다는 듯 연신 환호성을 내질렀고, 그렇게 시작된 박수 세례는 자동차가 무대 뒤편으로 자취를 감춘 뒤에도 멈출 줄을 몰랐다. “자동차 하나만으로도 티켓값을 낼 가치가 있다”는 뉴욕타임스의 평은 과언이 아니었다. 원작을 이미 본 중장년층에겐 짙은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원작을 아직 보지 못한 청년층에겐 상상력을 자극할 만한 공연이란 얘기다.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백 투 더 퓨처'의 한 장면. 요한 페르손 제공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백 투 더 퓨처'의 한 장면. 요한 페르손 제공
2월 3일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 아델피 극장은 공연 시작 한 시간 전부터 인파로 북적였다. 엄마 손을 잡고 과자를 사달라고 칭얼대는 초등학생 무렵의 아이들부터 성성한 흰머리 위로 중절모를 눌러 쓴 60대 신사까지. 뮤지컬을 보기 위해 극장에 발을 들인 사람들의 나이는 천차만별이었다. 세계 4대 뮤지컬로 꼽히는 ‘오페라의 유령’, ‘레미제라블’, ‘캣츠’, ‘미스 사이공’이 수십 년간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흥행을 책임져온 ‘터줏대감’이라면, 뮤지컬 ‘백 투 더 퓨처’는 이곳에 입성한 지 3년이 채 안 된 ‘신성(新星)’. 그렇다고 얕보기엔 이르다.

2022년 영국 공연계 아카데미상으로 불리는 ‘올리비에 어워즈’에서 최우수 신작 뮤지컬 작품상을 거머쥔 데 이어 지난해 진출한 미국 브로드웨이에서도 흥행에 성공하면서 작품성과 대중성 모두 인정받은 화제작이라서다. CJ ENM이 공동 프로듀서로 참여한 이 뮤지컬은 오는 6월 북미 투어까지 예정돼있다. 한마디로 검증된 작품이란 얘기다. 지금으로서는 ‘세계 뮤지컬의 메카’로 불리는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와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에서만 볼 수 있는 귀한 작품인 만큼, 두 나라를 방문한다면 꼭 봐야 할 공연으로 손꼽힌다.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백 투 더 퓨처'의 한 장면. 요한 페르손 제공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백 투 더 퓨처'의 한 장면. 요한 페르손 제공
‘백 투 더 퓨처’의 뮤지컬 버전은 영화 1편 플롯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록큰롤을 좋아하는 평범한 고등학생 마티 맥플라이가 괴짜 과학자 브라운 박사가 발명한 타임머신 자동차를 타고 30년 전 과거로 떠났다가, 현재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 겪는 좌충우돌을 그린다. 사실 영화를 원작으로 삼는 뮤지컬에서 가장 중요한 관람 포인트 중 하나가 바로 ‘기존 작품과의 싱크로율’인데, 이런 면에서 '백 투 더 퓨처'는 꽤 훌륭하다. 영화의 메가폰을 잡았던 할리우드 거장 감독 로버트 저메키스와 극작가 밥 게일이 대본을 쓴 영향이다.

뮤지컬에선 브라운 박사의 목숨을 위협하는 게 리비아인들의 총격이 아닌 방사능 중독으로 설정이 바뀌긴 했지만, 대부분 장면에서는 대사 한 문장, 캐릭터의 독특한 숨소리 하나하나까지 똑같이 구현해낸다. 빠른 전개와 질서정연한 플롯, 자연스러운 장면 전환은 관객을 무대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뮤지컬이란 장르의 특성상 많은 양의 노래가 작품에 들어가야 하기에 영화에서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덜 한 장면들이 걸러진 면이 있지만, 전체 흐름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백 투 더 퓨처'의 한 장면. 요한 페르손 제공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백 투 더 퓨처'의 한 장면. 요한 페르손 제공
‘드로리안’의 부활과 더불어 가장 창의적인 볼거리는 자동차와 계단. 실물과 특수 영상을 접목해 진짜로 차가 객석을 향해 돌진하고, 배우가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것처럼 만들어낸다. 자동차가 과거로 떠나는 장면에선 차체 앞뒤에서 움직이는 풍경 영상과 계기판 영상을 띄우고, 브라운 박사가 시계탑을 오르는 장면에선 그의 발에 맞춰 계단이 밑으로 하나씩 떨어지는 영상을 겹쳐 보이는 식이다.

뮤지컬 넘버(노래)로 쓰인 주제가 ‘사랑의 힘(Power of Love)’을 비롯한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과 17개의 신곡은 특유의 쾌활한 에너지로 연신 귀를 사로잡는다. 원작의 음악을 작곡한 앨런 실베스트리와 6번의 그래미상을 거머쥔 팝 음악 작곡가 글렌 발라드가 합심한 결과다. 원작 음악의 청각적 인상이 워낙 강렬한 만큼 이를 뛰어넘을 만한 신곡을 찾기가 어렵다는 게 아쉽지만, 캐릭터별 성격을 더 깊이 있게 표현하는 장치로선 충분하다.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백 투 더 퓨처'의 한 장면. 요한 페르손 제공
영국 런던 웨스트엔드에서 공연 중인 뮤지컬 '백 투 더 퓨처'의 한 장면. 요한 페르손 제공
화룡점정은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력과 가창력이다. 주인공 마티 맥플라이 역할을 맡은 벤 조이스는 폭발적 가창력과 능청스러운 연기력, 유려한 몸짓까지 발군이었다. 브라운 박사 역할을 맡은 코리 잉글리쉬는 재치가 녹아있는 탄탄한 연기력으로 공연 내내 관객을 쥐락펴락했다. 연륜이 돋보이는 탁월한 가창력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들뿐만이 아니다. 주·조연 할 것 없이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연기 구멍'이라 할 배우는 없었다. 극의 완성도가 높을 수 있었던 이유다.

"(뮤지컬로의 각색 과정에서)우리는 새로운 작품을 만들고 싶지 않았습니다. 단지 원작을 조금 더 매끄럽게 만들고 싶었습니다." ‘백 투 더 퓨처’ 극작가 밥 게일이 남긴 말이다. 그의 말처럼 원작의 정신은 그대로 이어졌으나, 작품이 전하는 에너지와 감정, 시·공간적 경험은 분명 다른 것이었다. 배우의 숨소리까지 느껴지는 살아있는 연기부터 온몸을 감싸는 폭발적인 음향과 섬광이 난무하는 화려한 무대 효과, 눈앞에서 날아다니는 타임머신 자동차까지. 시대의 고전으로 사랑받는 영화 '백 투 더 퓨처'가 수많은 속편, 리메이크 제작 제안을 모두 거절하고 '뮤지컬로의 귀환'을 선택한 이유를 납득할 만한 무대였다.

런던=김수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