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고희승 작가
출처 = 고희승 작가
타인의 집에 방문하면, 내 집 가구 배치, 물건과 크게 별다르지 않음에도 나와 다른 그곳에 사는 이의 삶과 취향이 고스란히 보인다. 어떤 물건을 고르고 어디에 두고 사는 지를 보면, 집주인이 어떤 삶을 살고 무엇을 중히 여기며 어떤 일을 하고 사는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그만큼 사물은 단순히 살림, 물리적 잡동사니가 아니라 사람 그 자체다. 그러니 집은 인간의 공간이면서 동시에 일상 사물의 장소다.

집에는 가족구성원 각자의 공간, 공용 공간이 암묵적으로 나뉘어 있는 것처럼, 사물들도 자기 자리, 거처가 있다. 나는 사람을 따라 물건이 집으로 들어오면, 며칠 둘 곳을 고민하고 이리저리 배치해 본다. 개중 마땅한 자리를 찾으면 사물을 둔다. 신중히 자리를 고른 것일수록 이사 가지 않는 한, 두었던 자리를 잘 바꾸지 않게 된다.

같이 사용하는 물건일수록 제자리에 두어야, 그리고 사물의 자리가 자꾸 변하지 않아야 다음 찾을 때, 나뿐 아니라 다른 식구가 찾을 때 물건을 찾지 못하는 불편함이 없다. 물건은 평소에는 자기 자리에 있다가 ‘필요’라는 부름을 받으면, 제 일을 하러 나온다. 일을 마치면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이처럼 사람뿐 아니라 일상 사물도 집 안에서 자기 점유의 공간, 고유의 자리가 있다. 우리는 수많은 사물과 집에서 동거동락(同居同樂)한다.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금속공예가 고희승은 사물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자리도 만든다. 금속기(金屬器)보다 반지, 목걸이, 브로치 등 현대 예술 장신구(Art Jewelry)를 주로 제작한다. 작가는 도시 풍경에서 흔적과 관련된 이미지를 채집하고 관찰했다가 장신구의 형태와 질감으로 표현한다. 비가 와 생긴 물웅덩이가 물 빠진 후, 그 자리를 여러 번 지나간 사람 발자국, 자전거·차바퀴 자국을 보았던 기억. 길가 전봇대나 차단봉이 땅에 깊숙이 박혀있다가 빠져나간 훅 패인 자리 등등 흔하고 특별하지 않은 일상 풍경이 그녀의 눈이 유심히 보았고 특별하게 기억하는 도심 속 흔적이다.
출처 = 고희승 작가
출처 = 고희승 작가
고희승은 금속공예라는 전통성과 재료에 한정되기보다, 은·플라스틱·흙·나무·철 등 다양한 재료를 사용한다. 자신이 보고, 관심을 둔 일상의 ‘흔적’을 표현할 수만 있다면, 질감과 형태를 용도로만 구현할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열려 있는 것이 작가의 장신구의 재료 선택의 조건이다.

고희승작가는 최근 2021년 북촌 예올가에서 <지시와 의지 Order and will> 그리고 2022년 KCDF갤러리에서 <자리하다 Nesting> 두 번의 개인전을 했다. 앞선 전시는 ‘장신구로서 반지’와 ‘사물로서 반지’를 비교하는 시도였다. 일상에서 자신이 만든 물건이 거처하는 장소와 방식을 ‘숨기다’, ‘드러내다’라는 ‘동사’로 나열하고 탐색했다.

<자리하다 Nesting> 전에서는 본격적으로 반지에 집중해 반지 보관함도 직접 제작했다. ‘장신구로서 반지’의 장소는 손가락이다. 손가락에 끼면 벗을 때까지 단단한 금속 반지는 무른 살을 누른다. 살과 맞물리고, 쓸며, 체온을 머금어 신체와 한 몸이 된다. 착용하는 동안 반지는 제 형태, 질감에 따라 손가락 피부에 다양한 흔적을 남긴다. 하루 종일 끼던 반지를 빼었을 때, 손가락을 한 바퀴 휘돈 붉은 자국, 반지 간격만큼 눌리고 땀에 무른 자국을 보고 있으면, 반지가 없어도 내 손에 아직 반지가 있는 것 같다.
GettyImag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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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물로서 반지’의 장소는 ‘장신구로서 반지’와 다르다. 어떤 이는 반지를 빼서 접시 형태의 트레이에 보관하기도 하고, 거치대에 걸어두기도 한다. 나의 경우 착용하지 않는 반지는 반드시 보석함에 넣어 둔다. 되도록 공기가 닿지 않고 손이 타지 않지 않는 곳에 두어야 다음에 찾는 데 수월하고 반지의 상태도 좋다.

전통적으로 고급 장신구 가게에서는 장신구를 구입하면, 전용 보석함에 넣어 포장해 준다. 보석함은 최대한 장신구의 매력을 돋보이게 하고, 스크래치가 생기거나 세팅 등이 다른 장신구와의 접촉으로 손상되는 것을 예방한다. 고급 장신구일수록 장신구함에도 좋은 재료를 사용하고 장인의 솜씨를 부려 장신구 품격과 가치에 걸맞은 제작의 공을 들인다. 사용자도 구매 시 받은 장신구함을 버리지 않고 계속 사용해 보관한다. 금속공예만의 장신구 판매와 사용의 문화다.

현대 장신구의 맥락에서, 보석함 제작은 비용 절감의 차원에서 많이 간소화되거나 기존 포장재로 대체되고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공예가가 장신구뿐 아니라 장신구 보관함까지 관심을 기울이고 직접 제작하는 것은 단지 물건을 안전히 보관하기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물건을 아무 데나 두면 반드시 제 가치를 잃어버리거나 손상되기 쉽다. 자신이 제작한 반지를 사용자가 귀히 아끼고 소중히 다뤄주길, 오래 사용하길 바라는 작가의 마음이 함이 있어 더 절실히 느껴진다.
출처 = 고희승 작가
출처 = 고희승 작가
그러나 고희승의 반지함은 단순히 반지의 쉼터가 아니다. 반지가 없어도 우리는 빈자리에서 반지의 모양, 반지가 머물고, 눌리고, 기대고, 남겨졌던 자리 그리고 다른 반지와 맞물리고 교차했던 현장을 볼 수 있다. 고희승 작가는 복제품이 아니라 누군가의 손가락 형태와 너비에 맞게 맞춤형으로 제작한 유일한 반지를 제작한다. 유일한 사물, 누군가의 신체에 꼭 맞는 유일한 사물만이 머물 수 있는 자리, 유일한 신체의 형태이자 장소가 고희승의 ‘반지함’이다. 하루 종일 나의 체온을 기억하고 내가 누군가의 손을 잡고, 어떤 무엇을 들었던 매 순간을 기억하는 물건. 나의 살갗에 어느 것보다 밀착해 나의 체온과 몸을 기억하고 있을 고단한 사물이 쉴 자리, 사물의 집이 고희승의 반지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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