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을 가꾸는 뜻
정섭

구 원(畹) 넓이 난초 가꾼 강변 텃밭
팔 원(畹)만 그리고 다 마치지 못하였네.

세상만사 만족스러운 때 언제 있었더냐
나머지 가꾸는 일은 뒤에 오는 사람의 몫.

八畹蘭

九畹蘭花江上田, 寫來八畹未成全.
世間萬事何時足, 留取栽培待後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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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사람의 몫을 남겨두라 [고두현의 아침 시편]
시서화에 뛰어났던 청나라 시인 정섭(鄭燮, 1693~1765)의 시입니다. “대나무를 그리면서 벌과 나비가 수선 떠는 것을 피하려 꽃을 그리지 않았다”던 그의 성정이 그대로 드러난 작품이죠.

이 시에 나오는 구원(九畹)은 초나라 시인 굴원의 난초밭 넓이를 말합니다. 시인은 구원 중에서 팔원만 그리고 나머지는 뒤에 오는 사람의 몫으로 남겨놓는다고 노래합니다. 완전무결한 결과만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그 과정에서의 배움, 또는 덕성을 중요히 여기라는 뜻이기도 하지요.

누구나 무슨 일을 할 때 완결을 목표로 하지만 미완으로 그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결과 지상주의 사회에서는 더욱 성과에 집착하게 되죠. 그렇다 보니 과정의 정당성과 노력의 가치보다 요령과 편법이 우대받는 현상까지 생깁니다.

많은 사람을 감동케 한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 떠오릅니다. 알다시피 이 영화는 2004년 아테네 올림픽 여자 핸드볼 국가대표팀의 눈물겨운 이야기를 다룬 것이지요.

결과 지상주의의 관점에서 볼 때 이들에게 메달의 가능성은 없어 보였습니다. 이미 은퇴하여 아줌마가 다 된 선수들을 불러 모아 급조한 팀인데다, 국가대표 선수라고는 하지만 일당이 2만원밖에 안 되는 열악한 조건이었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들은 최종 결승전까지 진출했습니다. 연장에 연장을 거듭하며 혈투를 벌인 끝에 은메달을 따냈을 때 사람들은 열광했습니다. 영화에서는 눈물을 흘리는 선수들에게 감독이 “울지 말자”고 말합니다. 울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메달보다 그 과정이 소중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지요.

역사 속에서도 실패한 인물이 오히려 많은 사람의 기억에 남는 경우가 있습니다. 제갈공명은 뛰어난 지략과 병법으로 수많은 적군을 물리쳤지만 결국 사마의에게 졌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사마의보다 제갈공명을 더 기억합니다.

한때 로마를 위협하고 지중해 최강자로 군림했던 한니발 역시 패장이었지만, 사람들은 그를 굴복시킨 로마의 스키피오 장군보다 그를 더 명장(名將)으로 기억합니다. 이들이 마지막 결과보다 그 과정에서 보여준 리더십과 삶의 가치가 돋보였기 때문입니다.

개인의 과업도 마찬가지죠.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제대로 수행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는 클 수밖에 없습니다. 덕을 쌓는 것에 끝이 없듯, 미완에 그치더라도 가치 있는 노력의 의미는 빛납니다. 그것은 지금 당장이 아니라 ‘뒤에 오는 사람’들이 평가할 몫이기 때문이지요.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등 출간. 유심작품상, 김만중문학상, 시와시학 젊은시인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