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이 길어 아름다운 한 마리 사슴…명감독들의 뮤즈, 탕 웨이
나만 그러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탕 웨이는 노천명의 시를 생각나게 한다.(노천명은 대체 언제 적 사람이란 말인가. 1957년 46세의 나이로 타계한 전설의 시인이다.) '사슴'이라는 시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 관(冠)이 향기로운 너는 /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 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내고는 /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라는 시구로 돼있다.

이 시어처럼 탕 웨이만 보면 사슴이 생각나는데 실제로 그녀의 목이 유난히 길고 가느다랗게 보이기 때문이다. 탕 웨이만큼 목이 길고 아름다운 여인은 없다. 대체로 목은 사람들의 시선을 제일 먼저 잡아 끄는 경향이 있다. 그렇게 시각적이고 피지컬적인 느낌도 느낌이지만 탕 웨이는 노천명의 사슴처럼 물을 마시려다 물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고 상념에 젖는 여인의 자태를 연상케 한다.

근데 그게 참 매력적이다. 감독들이 죄다 탕 웨이에게 빠지는 이유이다. 실제 탕 웨이는 사슴의 표정과 눈망울을 지녔다. 탕 웨이의 키는 170㎝가 넘고 영화상 시상식에선 하이 힐을 신기 때문에 180㎝에 가까운 느낌을 준다. 같이 사진을 찍을 때 옆에 서면 초라해 보인다. 그나마 박해일이니까 그런 그녀가 커버가 된다. 남편인 김태용 감독도 키가 큰 편이다.

언젠가 탕 웨이를 무슨 시상식 대기실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그녀가 큰 키로 내려다 봤을 때의 그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촉촉히 젖은 눈으로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상냥한 웃음을 짓고 가볍게 악수를 하던 여배우는 미처 몰랐을 것이다. 한 평범한 중년 남자의 인생 모서리를 무너뜨리고 있었다는 것을.
탕웨이, 박해일 /사진=텐아시아 DB
탕웨이, 박해일 /사진=텐아시아 DB
탕 웨이를 보고 있으면 여배우란 실로 감독을 잘 만나야 하며, 인간은 사람을 잘 만나야 한다는 걸 느끼게 해 준다. 탕 웨이가 같이 작업한 감독들의 면면은 그런 얘기와 평가가 나오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데뷔 때 만난 감독이 대만 출신의 할리우드 거장 이안이다. 그 다음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시선을 지닌 김태용 감독이고, 그 다음이 가장 야릇하고 외계인 같은 사고를 지닌 중국의 예술감독 비간(畢贛)이다. 그리고 최근에는, 짜잔, 박찬욱 감독이다.

많은 사람들은 잊었지만 이안의 ‘색, 계’는 2007년 국내 개봉 당시 엄청난 구설에 올랐던 작품이다.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기 짝이 없고, 어쩌면 영화 수입배급사의 교묘하고 영악한 마케팅 술책이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당시 ‘색, 계’는 리얼 섹스 논란을 일으켰다. 양조위가 탕 웨이를 영화 속에서 유린하는 장면에서 실제로 행위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국내 개봉 때 방한한 이안과 탕 웨이가 기자 간담회에서 나온 불쾌한 질문들 때문에 난감해 했던 기억이 난다. 세상 살다 보면 그런 일도 있는 것이다.
섹계 / 출처 = 다음 영화 제공
섹계 / 출처 = 다음 영화 제공
‘색, 계’는 이안이라는 이름으로, 이안이라는 날개에 올라 타고, 탕 웨이가 스스로를 전 세계의 신성(新星)으로 등극시킨 작품이다. 잔혹한 정보부 대장을 암살하기 위해 미인계를 쓴, 홍콩의 학생운동가 얘기다. 무릇 세상의 모든 젊은 혁명가들은 숭고한 이념을 위해 목숨을 바치긴 해도 사실은 얼마나 치기 어린 행위로 얼룩진 결과를 가져 가느냐를 보여 준다. 영화는 이안의 그런 역사적 비관주의를 보여 주는데, 탕 웨이는 신인답지 않은, 불꽃 같은 연기를 펼친다. 이념에 목숨을 바친다면서도 마지막 순간에 울먹이는 탕 웨이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섹계 / 출처 = 다음 영화 제공
섹계 / 출처 = 다음 영화 제공
남자 감독의 분신은 남자 주인공이 아니다. 여자 주연이다. 그건 여성 감독이어도 마찬가지다. 감독들은 여배우에게 자기를 더욱 많이 투영시키는 심리적 경향을 보이며 여자 캐릭터를 통해 자기 영화의 화두를 던지려 한다.

이건 ‘헤어질 결심’에서 박찬욱 감독이 탕 웨이란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 낸 것만 보아도 알 수가 있다. 박찬욱은 ‘헤어질 결심’으로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절절한 러브 스토리를 만들어 냈으며 그건 그가 세상의 사랑이나 연애’따위’ 믿지 않는다고 늘 냉소적인 표정을 지으며 살아 왔어도 나이를 먹고 세상 풍파를 겪으며 ‘마침내’ 그렇지 않다는 점을 깨달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같은 인식을 박찬욱은 탕 웨이가 박해일에게 했던 말, 곧 "내가 그렇게 나쁩니까?"란 대사에 담아냈다. 이건 곧 ‘사랑이 그렇게 나쁜 것이냐’는 감독의 깨달음과 같은 반문이다. 이 영화에서 탕 웨이는 이런 대사도 한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기 시작했을 때 나는 당신을 떠났고 이제 내가 당신을 사랑하려 하니 당신이 나를 떠나는군요”. 이걸 탕 웨이는 차 안에서 독백으로, 1인 연기로 해 낸다. 실로 사람들의 가슴을 후벼 판다.

‘헤어질 결심’으로 탕 웨이가 이렇게나 연기력이 뛰어난 여배우였다는 사실을, 박찬욱은 각인 시켰다. 박찬욱이 또 다른 탕 웨이를 만들어 낸 셈이다.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인간은 사람을 잘 만나야 하는데 특히 여배우는 감독을 잘 만나야 한다.

‘만추’에서 가장 유명한, 현빈과 탕 웨이의 여운이 긴 키스 씬에서 김태용 감독이 공들여 찍은 쪽은 현빈의 시점으로 바라보는 탕 웨이의 표정과 입술, 자태다. 돌이켜 보면 이 장면은 김태용이 탕 웨이와 ‘결혼할 결심’을 보여 준 영화였다. 사람들은 알아 채지 못했을지언정 현빈과 입술을 포개던 탕 웨이만큼은 그걸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여배우는 감독을 잘 만나야 하며 인간도 잘 만나야 하는데 탕 웨이는 두 마리 늑대를 한꺼번에 잡은 셈이다. 뛰어나고 영리하며 아름답다. 누가 그녀를 뿌리칠 수 있겠는가. 하우 데어!(How Dare!).
만추 / 출처 = 네이버 영화
만추 / 출처 = 네이버 영화
탕 웨이에겐 범작도 많다. ‘북 오브 러브’같은 작품이 그렇다. 전작으로 ‘해양천국’ 같은 뛰어난 필모그래피를 지닌 설효로 감독의 영화였지만 ‘북 오브 러브’는 다소 지루했다. 탕 웨이는 평범한 청순미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비간이라는 중국 감독은 쉽게 말해서 피카소의 그림처럼, 살바도르 달리의 머리 속처럼, 칸딘스키의 추상화처럼 평범한 서사의 경험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독해하기 힘든 영화를 만드는 인물이다. 워낙은 작가 출신이다. 비간의 영화 ‘지구 최후의 밤’에서 탕 웨이는 고농도의 몽환적인 연기를 펼친다. 배경은 중국 카일리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카이리이며 한자로는 개리(凯里)인데 이 개리는 중국 귀주성의 도시이고, 영화는 이 주변 어디엔가의 동네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이다.

비간의 전작 ‘카일리 블루스’의 후속편 격이어서 이것만 보면 요령부득, 줄거리를 파악하기 힘들다. 압도적으로 예술성을 앞세우는 작품에서도 탕 웨이는 고혹적인 연기를 펼친다. 그러니 그냥 보면 된다. 특히 1시간이 지난 뒤 이어지는 물경 59분의 롱 테이크 씬을 보는 것만으로 절대 후회하지 않을 작품이다. 여배우는 이런 영화에 출연하면서 정신적으로 성장한다. 비간을 선택한 것을 보면 탕 웨이는 영리한 배우다. 정신이 맑은 배우다.
북 오브 러브 / 다음 영화 제공
북 오브 러브 / 다음 영화 제공
탕 웨이의 차기작은 남편 김태용 감독의 영화 ‘원더 랜드’다. 진작에 다 끝낸 영화지만 코로나가 발목을 잡아 아직까지 창고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 김태용이 이번에 또 얼마나 탕 웨이를 예쁘게 담아 냈을까. 그 둘은 잘 살고 있을까. 끝까지 잘 살아 갔으면 싶다. 그건 곧 많은 팬들이 바람일 것이다.(웬 상관이람? 칫!)